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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토끼 Jan 19. 2020

5. 무례함에 대하여,

영화 '조커'를 만든 사회의 무례함

‘아서’를 ‘조커’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사회의 무례함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조커에게 영화 속 사람들은 냉혹하고, 무례했다.

뜬금없이(?) 큰 소리로 발작하듯 웃는 그를 차별하고, 무참히 밟고, 때렸다.

아무도, 그의 사정에, 그의 스토리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정말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그들의 무관심은 조커에게, 또 조커와 같은 사람들(?)에게 일종의 무례함이었다.




어제는 부동산 계약을 했다.

집주인은 그에게 유리한 조항을 추가하기를 요구하고,

친절한 척하는 말투 속에서, 그는 아마도, ‘무례’하다.

세입자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으므로,

집주인에게 ‘당신 내가 고소하는 수가 있어!’하는 눈빛을 사정없이 쏘며

또 그에게 유리한 조항을 내민다.

집주인이 갑이 되는 계약이라지만, 세입자의 어떤 태도도, 아마도, ‘무례’하다.

집주인과 세입자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 공격한다.


회사에서도 무례함은 계속된다.

회사 상사는 후배에게 모든 것을 친절히 알려주지는 않는다.

‘야, 너는 이런 것까지 물어보냐’ 푹, 쉬는 그의 깊은 한숨에 후배 직원의 마음이 쓸린다.

하.....  상사는 후배 직원에게, 당연히(?) ‘무례’하다.

요즘은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후배 직원이 아니지.

‘난 이제 모르겠다, 회사는 월급 챙기는 곳이지’

마음의 상처를 뒤로 하고 유유히 퇴근하는 후배의 태도는, 어쩌면, 상사에 대해 ‘무례’하다.

선배와 후배는 서로가 서운하고, 서로 실망한다.




영화 속의 조커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화가 나 있다’라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언젠가 했던 말과 비슷했다.

‘왜 사람들은 늘 화를 내고, 서로에게 무례할까?’


그땐 마치 내가 피해자인 척, 나는 마치 좋은 사람인척 말했었는데,

그러는 나는 누군가에게 무례하지 않은 사람이었을까.


회사에 가는 전철 안에서, 누군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면,

나는 그에게 따뜻한 눈빛을 줄 수 있었을까.

무척이나 외로워 보이는 이웃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에게 도와달라는 듯한 눈빛을 보낸다면,

나는 그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었을까.


부동산 계약을 하는 그 순간에 나는 무례하지 않았는가,

회사에서 나는 무례하지 않았는가,


또, 주변 친구들에게 나는 우정을 담보로 무례하지 않았던가.

가족들에게 나는 가족애를 앞세워 항상 무례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진 자’는 ‘덜 가진 자’들에게 무례하다.

권력구조가 질서인 사회에서 ‘권력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례하다.

다수가 일반적이라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일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소외된다.


영화 <조커>에 대해,

많은 영화평들이 사회의 무례함과 냉혹함을 지적했다.


그렇지만,

나는 ‘나보다 더 가진 자’에게 무례함을 당한다 생각했지만,

그런데 혹시 ‘나보다 덜 가진 자’에게 무례하진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밤이다.  


내 별생각 없는 행동이 무례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그렇다고 내가 완벽히 착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그래도 조금은, ‘내가 무례하진 않은지’ 생각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커버 이미지: 영화 '조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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