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삭막한 마드리드의 감성 충전소.
Day 02.
스페인(마드리드)
#유심 전쟁의 끝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전날 안됐던 유심 문제에 대해 고객센터에 문의했다. 그런데 웬걸. 나는 어제 내내 마음을 졸였는데, 고객센터 직원이 정말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저희는 충전을 했는데, 충전이 안 됐었네요. 이제 되실 거예요."
순간 황당했다.
내가 원래 받고자 하는 서비스를 제때 받지 못한 것에 대한 화가 났다. 하루 늦게 개시해줬다고 종료일을 연장해준 것도 아니었다. 고객센터 응대 태도에 머리가 아파왔다. 도대체 일을 왜 이런 식으로 하는 걸까.
마음이 상했지만 이야기를 대충 마무리 짓고,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길을 서둘렀다.
난 즐겁고 행복하려고 왔으니까!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에서 꼭 해야지 라고 생각한 것 중 하나인 프라도 미술관. 이전에 친구랑 대학생 때 유럽 여행을 왔을 때는 <이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하는 그림>을 정해두고 딱 그 작품들을 위주로 보고 나왔었다. 그러다 보니 그림에 대한 깊은 의미나 배경에 대해 알기는 어려웠다.
뭘 좀 알아야 보이겠지 싶어서, 딱 3시간 동안 진행되는 투어를 신청했다. 투어는 1인당 1개의 수신기를 목에 차고 다니면서, 이어폰으로 가이드님 설명을 들으면서 진행이 됐다. 가이드님의 무심한 듯 섬세한 설명이 낮은 음성으로 들려오자 마치 라디오를 듣는 것 같았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작품은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이다. 어떻게 중세 시대에 이런 파격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걸까. 다양한 중세시대 작품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상상력과 색감이었다. 당시에는 '지옥에서 온 화가'라고 불렸다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탄성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걸작임에 분명하다. 미술 작품들을 감상하면서 혼자 "와~ 대박"하면서 탄성을 내뱉다 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스페인의 간략한 역사, 작가들 별 특징과 그들의 삶을 잠깐이나마 듣는 것만으로도 이 나라에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용기 있는 자가 맛있는 음식을 얻는다
투어가 끝나고,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됐다.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투어를 돌다 보니, 혼자 온 사람이 2명(남자 1, 여자 1) 그리고 2명이서 온 사람들이 2쌍이었다. 어떤 사람한테 물어봐야 할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나는 보통 먼저 말을 거는 스타일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분명 그랬는데, 대학생이 되면서 주도적으로 해야 되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선택적으로 내가 필요한 순간에는 용기를 내서 먼저 말을 걸거나 하는 게 가능해졌다.
성향은 바뀌었지만, 거절당하면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되도록 성공률이 높은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우선, 기본적으로 2명이서 온 사람은 성향에 따라 다르지만 물어봤을 때 안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면 친구들끼리 왔으면 미리 짜 놓은 계획이 있을 수도 있고, 불필요한 위험성(새로운 사람과 성향이 안 맞을 수도 있으니까)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쉬운 게 없다. 따라서, 혼자 온 사람한테 물어보기로 했다.
혼자 온 사람 중 남자분은 투어를 진행하면서 봤을 때 조용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언니분 한 분에게 여쭤봤다.
"혹시 점심 어디서 드실 거세요?"
처음엔 약간 주춤했지만, 이 언니분이 점심 같이 먹는 걸 수락했다. 만세!
언니와 함께 보통 2인분 이상이라 혼자서는 먹기 힘든 빠에야를 먹으러 갔다.
맛있는 첫 빠에야를 먹고 나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레티로 공원을 걸었다. 해가 질 무렵, 거리에서 펼쳐지는 공연들과 배를 타는 가족들의 모습이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다. 내가 느끼고 싶었던 여유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드리드는 바쁘디 바쁜 수도의 느낌이라, 예전에 바르셀로나에서 느꼈던 감동에 비교했을 때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넓은 레티로 공원을 걸으며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됐다.
바르셀로나와는 다르지만, 여기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구나.
석양의 따스함이 물빛에 일렁이는 것을 멍하니 보다가 사진으로 담았다. 언젠가 여유가 없을 때 사진을 보고 잠깐이나마 그 여유를 불러와야지.
#숙소로
첫째 날과는 다른 의미로 정신없었던 하루였다. 저녁에는 다른 동행을 구해서 간단하게 띤또 데 베라노(와인 칵테일) 두 잔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왔다.
혼자 다녀도 재밌네!
이대로 순조롭게 한 달 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기 억 에 남 는 순 간.
인터넷이 연결됐을 때. (다음부터 유심을 살 때는 고객센터 대응이 24시간인 곳으로 해야겠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엿본 화려했던 스페인의 옛날.
해질녘 레티로 공원에서 보트를 타고 놀던 사람들의 모습들. 공원 이곳저곳에서 펼쳐지는 거리 공연.
찰 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