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100가지 소소한 방법 #4
우리 어머니는 tv를 많이 보신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럿 있다.
우리 집은 거실이랄 게 없다. 밥 먹는 곳이 곧 잠자고, 쉬고, 티비 보는 곳이다. 어머니 주무시는 방향에서 티비가 제일 잘 보인다.
그리고 또 영상 보는 것도 좋아하시는 것 같다. 나는 집중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모양인지 차분히 앉아서 어떤 영상이든 관람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데 어머니는 다르다. 티끌만한 부위를 섬세하게 색칠해야 하는 명화 컬러링도 재밌게 하셨으니 말이다. 나 아마 이런 점은 아버지를 더 닮았는가 싶다. 아니면 별종이거나. 어쩌면 어머니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이 더 많이 방송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일단 전원일기는 안방에 갈 때마다 시청하시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또 내가 밥 먹을 때 폰을 본다면 어머니는 티비를 보신다. 휴대폰으로 즐기는 여러 가지 시간 떼우는 오락들은 퍼즐게임 말고는 일체 안하시는 듯하다. 연배가 있으시니 당연히 웹툰, 웹소설 안 보시고 즐겨찾는 인터넷 커뮤니티도 없다. 이찬원 팬카페 같은데는 이용할만 한데 어떻게 가입하는지도 묻지 않는 걸 보면 팬클럽 활동에는 관심이 없어보인다. 이른바 혼덕하는 타입. 네이버 뿜에서 유머글 보거나 브런치, 언론사, 카스 같은 곳에서 관심사에 맞는 글을 찾아보지도 않으신다. 구독하는 유튜브 채널도 아예 없다. 왜냐고 여쭈면 노안이 와서 그렇단다. 그래서 가까이서 보는 쬐끄만 모바일 화면보다 멀리 놓여있는 큰 화면을 선호시는 모양이다.
요컨대 생활 반경에 딱 적당한 위치에 있고, 노안으로 즐기기 적당하고,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이 많다는 이유로 많이 보고 계신다. 요즘 사람들 티비 잘 안본다던데 어머니는 토막난 시청률을 책임지는, 든든한 시청자다.
어머니한테 최애 콘텐츠가 뭐냐고 여쭈면 뭐를 선택하실까?
일단 내가 아는 최애 프로그램만 해도 5개다. 전지적 참견 시점, 전원일기, 나는 자연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금쪽같은 내 새끼, 심야괴담회는 한편도 빠짐없이 챙겨보시는 것 같다. 심지어 전원일기는 본 것도 또 본다. 근데 드라마덕후 기질도 있어서 옛날 드라마 최신 드라마 가리지 않는다. 어머니의 드덕 기질은 언니가 물려받았다. 뿐만 아니라 뉴스 방송, 그것이 알고 싶다, 사랑과 전쟁 같은 시사 다큐도 좋아하신다. 내가 남편놈(혹은 시누이, 형부 등) 때문에 열받으니까 그만 보자고 해도 꿋꿋하게 시청하신다. 귀동냥으로도 어떤 나쁜 놈이 누구를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렸는지 알게 되니까 분노의 사이클을 벗어날 수가 없다. 덕분에 나만 혼자 온갖 열불 다 내고 있다. 미스터트롯이나 불후의 명곡 같은 음악 프로도 종종 보신다. 나는 노래 부르는 프로그램이 좋으니까 그때는 안경 가져와서 같이 본다. 현실적인 인간사를 좋아하시는 것 같다.
나는 기껏해야 금쪽같은 내새끼, 책 읽어드립니다, 연애의 참견 정도밖에 안 떠오른다. 뮤지컬, 코미디, 풍경 묘사 위주의 방송을 좋아하는데 방송국이 이런 건 잘 안 만들어준다.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12월 중반에 시작해서 1월 후반까지 vod 서비스를 이용했다. 사실 한달 무료로 해보라고 프로모션 전화 오길래 얼레벌레 하게 된 건데 어머니가 뽕 뽑아주실 것 같아서 취소 안하고 냅뒀다. 방법을 알려드리고 자주 보시라 말씀 드렸다.
근데? 왜 전원일기만 보고 계시는 것 같지?
어머니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심야괴담회, 꼬꼬무 이런 건 최신편까지 싹다 봤다고 한다. 다른 것도 한번 도전해보셨으면 좋았을텐데.
집에 어머니 말고는 달리 봐줄 사람이 없고 가격대도 좀 비싼 편이어서 2달째에 취소했다.
사실 1달 무료 끝나고 취소하기로 합의를 봤는데 기간이 지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조금 결제하게 되어버렸다. 이럴 거 같아서 진작 취소하려 했었는데 뭐 어머니가 최애 프로그램 정주행 끝내셨다니 그럭저럭 만족한다. 대충 이번 작전 만족도는 대충 그럭저럭 괜찮은 정도로 치겠다.
슬프게도 우리 집 티비는 OTT 연동이 안된다. 휴대폰에 어플을 깔아드렸는데 안 쓰시더라. 노안 때문에 작은 화면에 집중해서 뭘 보는 것이 그렇게 편하진 않다고. 휴대폰보다 커다란 종이책도 돋보기 안경을 계속 끼고 봐야 하기 때문에 눈에 피로도가 높다며 기피하신다. 컴퓨터 모니터는 낯설으신 것 같다. 일단 나랑 동생이 번갈아서 붙잡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저번에 언니가 집에 왔을 때 패드로 오징어게임을 보여드렸는데 하루인가 이틀만에 정주행을 끝내셨다. (그때 귀동냥한 걸로 오겜이 대충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게 되었다..) 티비나 모니터만큼은 아니지만 휴대폰보다는 큰 패드 정도면 괜찮은 모양이다. 근데 언니가 타지에서 일하고 있는 상태고 나와 동생은 패드가 없으니 이를 어쩐담?
어머니는 자극적인 것, 평화롭고 차분한 것, 웃기고 발랄한 것 가리지 않고 잘 보시니까 영상 시청계의 천재가 틀림없다. 근데 그놈의 노안과 티비의 한계 때문에 다양한 영상을 체험하지 못하신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티비를 교체하는 게 저렴할지 패드를 구입하는 게 저렴할지 모르겠다. 일단 돈을 더 모이는 게 먼저인 것 같은데. 언젠가... 꼭... 돈 많이 벌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