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오션 Jan 29. 2023

마지막이 될지 몰랐던 마지막

20년 12월에 썼던 외숙모 추모글

마지막이 될지 몰랐던 마지막

늦잠을 잘 수 있는 일요일 11시. 어머니가 침통하게 통화하는 목소리가 귓바퀴에 얹혔다. 3일 장, 코로나, 이런 단어가 언뜻 들렸다. 설마, 설마.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잠에서 깬 나는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돌아가셨대. 


물어보지 말걸, 잠깐 후회했다. 일어나자마자 이런 소식이라니. 어머니는 서울병원으로 가겠다 하셨다. 나도 따라가고자 했으나, 느적느적 행동하는 내 속도를 맞춰줄 겨를이 없고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장례식장에도 인원제한이 걸려있는 상황이었다. 하필 마땅한 교통편이 없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준비하는 내내 언성을 높였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침착하게 대꾸해주었다. 


사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하필 겨울에, 일요일에 가셨네. 갈거면 더 있다가시지, 사회적 거리두기 2.0단계가 진행 중인데 볼 수도 없게 가시다니. 외숙모가 떠난지 하루 지나고 전국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되었으며 한파가 닥쳐왔다.


외숙모가 위급했던 몇 주의 기간 동안 매일같이 삼촌과 사촌, 외숙모를 걱정했던 어머니는 막내이모와 함께 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남겨진 나는 다른 이유로 심란해졌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처지가 애석하다며 울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예민해져 언성을 높였다. 계속해서 걱정을 했다.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되었다며 꺼이꺼이 우셨다. 그의 숱한 인생으로 견주어 가까워진 이별을 직감했다. 나는 말했다.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 벌써 슬퍼하지 맙시다. 나는 다른 생각을 했다. 


우리의 고질적인 가난은 무정한 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며, 어머니는 자신을 반성하면서 말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살아있는 게 낫다. 누구는 아픈데 자기는 그깟 일로 언성을 높였다니. 내가 보기엔 달랐다. 당장 우리 앞에 닥친 일 중에 버겁지 아니한 것은 없었다. 모두가 눈물을 쫙 뺄만한 일이었다. 


나는 혀를 깨물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혀만 깨물어도 그리 아픈데 외숙모는 얼마나 아프겠어? 굳이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상상이 되지도 않았다. 나는 골몰하기나 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가난을 타파할 수 있을지를. 


그리고 편지를 썼다. 첫월급을 받은 기념이었다. 병원비나 택시비로 쓰셨으면 해서 용돈을 비교적 두둑히 넣어드렸다. 외숙모는 우리가 아픈걸 몰랐으면 했다. 외숙모는 숨기려 했으나 소식을 전해들을 때마다 슬퍼하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면 자연히 알게 되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당부로 편지에는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티내지 않았다. 그러면서 힘이 될 수 있도록 신경써서 적었다. 철부지처럼, 나는 삼촌보다 외숙모가 좋아요. 다음에도 함께 놀아요. 


편지에는 내가 생각하는 외숙모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운전을 부드럽게 하는 베스트 드라이버. 

내게 그 실력을 보여준 칭찬의 달인. 

나긋나긋한 말씨의 점잖은 선생님. 

대학 시절에 내가 좋아할만한 책을 정독했던 지식인. 

섬세한 요즘 사람. 


내가 기억하는 외숙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외숙모가 신세를 한탄하며 희망을 버릴까봐 걱정을 했었다. 그래서 읽고 마음이 충만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편지를 썼다. 떠나갈 땐 떠나더라도 조촐한 마음 정도는 받아주고 가셨으면 했다. 떠날 이가 만족한다면 편히 보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어머니가 내 편지를 보시고 운 것처럼, 외숙모도 감동 받아서 울겠지. 철없게도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뿌듯해했다. 


다음에 오는 외할아버지 제사 때 어머니가 대신 편지와 용돈을 전해주시기로 하고 날을 기다렸다. 그 때까지만 해도 외숙모는 괜찮았다. 차도가 있었다. 수술도 성공적이었고 일주일에 한번 검진도 꼬박꼬박 다녔다. 삼촌이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고 있으며 매일 빠지지 않고 운동도 했다. 한적하고 온화한 장소에 요양 차 거주지를 옮길 계획도 세웠다. 실행만 하면 되었다. 그 때가 11월이었다. 


어느 날 집에 돌아갔더니 어머니가 비탄에 차서 말했다. 뇌까지 전이가 되었대. 몸 안에 있는 암세포는 거진 다 없앴는데 그게 뇌까지 갔단다. 인생사 무정하고 야박하다. 


두통이 심해서 엠뷸런스 타고 실려갔다. 일반 진정제가 안 먹힐 만큼 고통이 심각하여 마약 성분을 쓰고 있다. 정신을 잃어서 깨어나지 않는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란다. 한번도 울지 않고 꿋꿋했던 삼촌이 울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 뒤로 들려온 소식은 그런 것들이었다. 집에 가면 외숙모는 한층 더 아파있었다. 


부모는 병원에 가있었다. 외숙모는 아픈걸 숨기고 있다가 어느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완치되어 있기를 바랬다. 우리야 당연히 몰라야 하는 입장이었고, 무엇보다 딸이 걱정하는 걸 제일 꺼려했기에 그 애조차 자세한 상황을 전해듣지 못했다. 대신에 혼자 남은 집안이 무섭다고 했다. 어머니는 며칠 외숙모네 집에 가서 혼자 남은 딸을 돌봤다. 간 김에 청소도 해주었다. 제사 일정이 취소되어 전해주지 못한 편지를 외숙모네 집에 놔두고 왔다. 삼촌이 잠깐 들리면 보게 되겠지. 집에 와서는 거기서 엄청 으스스하게 가위 눌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던 12월 둘째주였다. 외숙모의 바램대로 엄마 아프신 것도 제대로 몰랐던 어린 딸이, 막내이모 부부의 차를 타고 서울 병원으로 갔다. 그 애는 이동 내내 초조하고 긴장한 상태였다고 했다. 외숙모는 아마 딸을 맞이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자다가 숨쉬는 것을 자꾸 까먹어서 삼촌과 서울이모가 번갈아서 깨워주던 시기였다.


모든 소식을 전해듣는 나는, 하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저러다 낫겠지, 아닐 거야. 어머니는 숱한 인생사를 토대로 외숙모와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다. 모른체 했지만 사실은 나도 한때의 고비일 뿐이란 믿음이 얼마나 가당치않은 거짓부렁인지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병문안을 가고 싶어했다. 방문 약속이 몇 번이나 취소가 되었다. 어머니도 못 가시는데 당연히 나는 갈 수 없었다. 우리는 편지를 전해주지 못했다. 코로나 때문에, 수술날이 급해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정신을 까무룩 잃어서, 시각과 청각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에. 


우리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날이 멀어져 갔다. 벌써 몇 달이 흘렀다. 내 사진첩에는 정답게 마주선 외숙모 부부의 모습이 남아있다. 자연 속에서 체력을 키우는 외숙모를 따라서 다같이 숲에 갔던 10월은 그들이 나의 피사체였다. 어머니는 그 사진을 usb에 고이 보관해놓으라고 몇 번이고 내게 당부했다. 


다시 사진을 찍어주겠노라고 편지에 썼다. 다음에야말로 더욱 멋진 인생샷을 찍어주겠다고 호언장담했다. 다음에도 친척들이 다 모여서, 산책을 가자고 했다. 일방적으로 기약했던 다음은 영원히 오지 않게 되었다. 


10월에 편지를 쓸 때도 외숙모의 제사가 치러지는 지금도 처음에는 시를 쓰려고 했다. 외숙모가 기운날 수 있도록 아름답고 희망적인 시, 그리고 충분히 추모할 수 있도록 진실한 시. 그러나 나는 충분히 곱씹지 못하였다. 의미를 곱씹고 곱씹고 곱씹어서 만들어야 하는 게 시인데 가증스러운 시편을 가볍고 아름다운 언어로 꾸며서 제작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나는 그래서 수필로써 사념을 토해냈다. 


죽음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다음이 없기 때문이다. 산자들은 살아가고, 일상을 유지하고, 그러다가 언제 또 한 장소에 모일 것이다. 외숙모가 존재했던 고성에, 외숙모가 방문했던 하동에, 외숙모가 흔적을 남긴 장유에. 삼촌과 어린 딸도 우리를 만나러 올 것이다. 일상이 주는 망각 덕택에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던 우리는 그제서 다시 떠올린다. 아, 그 옆에 그 사람.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있어야 하는데 없는 사람. 그 때마다 삼촌이 가진 영원한 그리움에 전염되어 무수한 열병을 앓고 말 것이다. 어쩌면 장례식장에도 병문안도 못가본 우리 사이 진정한 이별은 어느 모임날 빈자리를 무의식적으로 찾을 때일 거 같다는 축축한 예감이 들었다. 


죽음이 서글픈 이유는 잊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기억하려고 무진장 애쓴다. 우리의 존재는 덧없고 애틋하기에, 외숙모가 나에게마저 얼마나 좋게 기억될 수 있는지 편지에 적었다. 그건 내 진심이었고 나의 사랑법이었다. 나는 외숙모를 떠나보내기 위해서 외숙모가 만족하고 떠나기를 바랐다. 무수하고 옅은, 가증스럽고 한심한 마음 속에서 그것만은 진실이었다. 시간이 사람을 앗아갈 때 충분히 작별인사를 할 수 있기를. 


내 편지는 결국 전해지지 않았다. 작별인사를 넉넉히 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앓다가 빠르게 떠났다. 코로나 때문에 장례식장에도 가보지를 못한다. 마지막이 될지 몰랐던 마지막만 남았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외숙모는 우리의 마음을 알고 있다. 왜냐면 그 옆에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던 삼촌이 있었기 때문에. 망자의 진심일랑 알 겨를이 없지만, 그래도 그런 믿음이 당당한 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외숙모가 오염된 육신을 버리고 자유로워진 겨울, 12월, 일요일, 오전 11시. 



-

외숙모가 떠나고 갑자기 추워진 12월 중반, 외숙모의 냉혈한 조카 씀. 

매거진의 이전글 얼룩진 그 아이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