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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오션 Jul 25. 2022

얼룩진 그 아이 2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려는데 잘 안된다


까맣게 달구어진 밤이다. 오늘도 별은 가리어져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얼룩을 덧칠한 그 녀석을 보게 되었다. 산 왼쪽 길에 있는 호숫가에서 얼굴을 벅벅 씻고 있었다. 사슴이 호수에서 선녀님을 자주 뵌다고 했다. 그날따라 궁금해서 따라갔을 뿐이다. 매끈한 바위에 푸른 날개옷이 덮여있었다. 그 뒤에서 선녀는 얼룩을 거칠게 벗겨내고 있었다. 내가 얼룩 칠한 놈들을 욕할 때 그 녀석은 항상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런데 나는 계속 빨간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아이는 파란 옷을 안 입은 적이 없었다. 거기서부터 우리는 틀어질 사이였다.  


 불길한 예감이 맞는 거였구나. 나는 이 녀석에게 홀린 거구나. 성나서 그 녀석을 일갈했다. 내 모든 것을 의탁하는 걸 보면서 비웃었겠지, 너는 그래봤자 우리를 해치러 온 사람인데. 그 녀석은 창백해진 얼굴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자기가 원해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니라고 했다. 아무도 죽여본 적 없다고 했다. 그래도 너는 그 얼룩반점들의 무기를 닦아주고 길을 안내해주고 수건으로 피를 닦았겠지…. 


 항포하게 끊으려는 내 발걸음 뒤로 그 아이가 소리쳤다. 만약 이 짓을 멈춘다면 다시 호합해줄 거냐고. 반우와 떨어지기 슬프다고 했다. 앞으로 3번 둥근 달이 휘영청 밝은 밤마다 용서를 구하러 나오겠단다.  


 나는 그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얼룩이들은 나를 미워한다. 내가 빨간 부족 핏줄이기 때문이다. 나도 얼룩이가 싫다. 뒷산을 파헤치고 우릴 위협하는 놈들이다. 그 아이는 얼룩이다. 소년병이지만, 어쨌든 얼룩이다. 그 아이는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같다. 엄지로 섬세하게 눈가 주름을 펴주고 아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줬다. 게다가 용서를 간청했다. 어째서? 아니면 모든 행동이 미끼이고 거짓인가? 나는 그 아이를 미워하려는데 잘 안된다. 어째서? 그 아이는 얼룩이잖은가? 정말 알 수 없어서 잠을 줄여 고민했다.  


 그리고 상상했다. 그 아이를 덜어낸 일상이란…. 예전처럼 공터를 독차지할 수 있다. 가끔 얼룩이한테서 도망치거나 아버지한테 혼나겠지. 밥은 매일 맛있을 것이다. 산할아버지가 땅 속의 지렁이가 내가 가꿔놓은 꽃들이 아무 대답 안해도 적적하지도 섭섭하지도 않을 거다. 밑질 거 없다. 평범하고 익숙한 일상이다. 그런데 나는 한번 맛본 단재미를 관두지 못했다. 자꾸 아른거린다. 비록 거기에 독이 들어있더래도.  


 나는 다시 확인해보기로 했다. 누가 들었으면 바보라고 했겠지. 다음 보름달이 뜬 날, 완전히 어둑해지기 전에 길을 나섰다. 나무 뒤에서 어슬렁거리던 암귀가 갑자기 덤벼들었다. 한참을 싸우고 한차례 열병을 앓았다. 어물어물하다가 헤까닥하고 또다시 가물가물하다가 침묵하는 시간을 지나서 간신히 눈을 떴을 때는 방안에 나 혼자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가만 앉아 날짜를 헤아렸다. 동그랗게 빚은 달덩이가 휘영청 뽐내러 오는 날이다. 밖이 어쩐지 소란스러웠다. 무언가 타는 냄새도 났다.  


 그 아이가 3번 망월이 뜬 밤 여기서 기다린댔다. 마지막이니까 오늘 같은 음습한 날이라도 가야지.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잘 보이지가 않는다. 뒷문으로 슬며시 나와서 더듬으며 걸었다. 불길한 예감은 나의 오해일까. 좋은 예감은 나의 착각일까. 둘 다 너의 진심이거나 나만의 진심일 수도 있다. 과연 어떨까, 나는 그걸 확인하러 간다.  


 까맣게 달구어진 밤이다. 오늘도 별은 가리어져 보이지 않는다. 뒷산 주민들도 암흑에 눅눅히 녹아들었다. 모든 것이 내 눈 앞에서 몸을 숨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더듬으며 찾아간다. 공터 방향에서 남자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더 다가가니 그 아이가 울고 있다. 더 다가가니 하늘에 구멍이 났다. 남자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 아이가 슬픈 비명을 흘렸다. 내 발자국 소리가 커질수록, 그 아이는 곡을 그친다. 그 녀석이 어둠 속으로 완전히 돌아가기 전에 내 발자국이 공터 입구에 찍혔다. 어두컴컴한 시야 끝에 그 아이가 흐릿하게 걸린다. 그 녀석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그 녀석의 푸른 옷이 어딘가 빨갛게 물들여 있는 것 같다. 나는 헤엄치며 걸어갔다.  


 그 녀석은 내 옷깃을 붙잡았고 나는 그 아이 곁에 앉았다. 그 아이 어깨를 쥐잡고 묻는다. 나를 싫어해? 싫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좋아한다고 했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미워할 수가 없었다. 웬만치 슬금슬금거려야지, 숨을 거면 잘 숨든가, 어디서 뭘 하든 계속 내 시선에 잡히니까 오히려 신경이 헤쳐져 잠도 못 잤다. 그런 걸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나의 침묵에 한동안 정적이 감돈다. 불현듯 그 아이가 나한테 사과한다. 괜히 내가 붙잡아서 예쁜 흰 옷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고. 사실은 진작에 관두고 싶었다고 했다. 더러운 굴레를 벳기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라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은 이런 식으로 역겨운 허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너는 점점 흐려진다. 어쩐지 이별을 직감했다. 함께 걷자고 했다. 다리가 저려서 일어설 수가 없다고 했다. 나도 자는 새에 밤눈이 어두워져 앞길을 헤아리기 힘들다. 그래서 땅을 더듬으며 걷는 방법을 택했다. 우리는 엉덩이로 걸었다. 먹구름을 헤쳐 남겨놓은 별을 그 아이에게 먹이고 공터를 빙 돌다가 호숫가에 가서 서로의 얼굴을 씻겨주었다. 이렇게 이 밤을 내내, 함께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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