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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오션 Feb 26. 2023

토익이 싫어서

900점을 노리는 건실 청년과 600점 미만의 비행 청년. 나는 후자였다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 소설은 호주로 이민을 떠난 계나를 중심으로, 한국의 여러 사회상을 보여준다. 


보는 이마다 제일 공감 가는 대목은 다를 거라 본다. 나는 56쪽에 계나의 첫 남자친구 지명이 수험생활로 고통받는 부분이 제일 인상 깊던 것 같다. 고작 한 문단뿐이지만 내가 20대 초반에 가졌던 핵심적인 사회 불만이 담겨있다. 지명이처럼 묵묵하게 정진하는 효자가 절대 아니면서 투덜거리기는 오질라게 투덜거렸다. 


우리 과에선 졸업하려면 토익 600점을 넘어야 했다. 1학년, 2학년 때는 스펙 어쩌고 하는 골치 아픈 문제 따위 거들떠도 보지 않았는데 3학년 되고서는 슬슬 신경 써야 했다. 나랑 1학년 때 같이 대외활동 하던 친구는 학교에서 하는 토익반을 신청했다. 나도 학교 토익반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어차피 해야 되는 거라면 값싼 학교 토익 수업이 여러모로 나았다. 토익 따위에 돈을 많이 내긴 싫었으니 온라인 강의는 논외고 뭘 어떻게 배우든 내가 잘하면 되었다. 

그런데 나는 소극적으로 공부를 내팽개치는, 문제는 없는 반항아였다. 출석은 빠지지 않았지만 숙제를 제때 해가진 않았다. 이 우주공강 시간이 복습하기 제격인 건 아는데 졸리니까 자는 게 더 중요했다. 그 친구가 바로바로 700점 이상을 따낼 때 나는 바닥을 기었다. 


노오력이 부족한 건 맞다. 맞는데 의욕이 전혀 나지 않았다. 이런 재미없는 공부를 꾹 참고 해야 어른이 되는건 알겠는데 늘 손에 잡히는 건 펜이 아니라 스마트폰이었다. 거대한 토익 카르텔에 덤벼들 짬도 없고 쨉도 안되면서 속으로 무진장 꿍얼거렸다. 토익 잘 친다고 외국 회사 가서 업무를 제대로 할 것 같으냐. 학생이라 업무의 업 자도 모르는데 이해도가 높을까. 점수 잘 따내봤자 2년 뒤에는 없는 셈 친다. 공부한 내용은 일주일도 안 되어 휘발된다.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가? 

높은 토익 점수를 강요하는 어른들이나 먼저 쳐봤으면 좋겠다. 그들에게는 푼돈이겠지만은 수험료로 날린 10만 원이 피 같은 돈이란 말이다. 정말이지 어른들은… 한국사회란…. 조금 늦었다고 시험장 입장을 아예 차단당한 2번째 도전 날에는 언니한테 전화해서 열변을 토했다. 한국은 문제야!  


토익 카르텔에 놀아나는 가난한 소비자가 나라서 정말 비참했었다. 개천에서 태어난 너를 받아줄 수는 있는데 좋은 점수를 증명해봐라. 근데 그러기 위해선 교재도 사고 강의도 듣고 수험료도 내렴! 우리 마음에 드는 점수를 딸 때까지! 당연하긴 하다. 아무나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 쟤나 나나 일 시켜보면 적당히 잘하는 건 똑같고, 근데 우리는 대단한 기업이고, 그러니까 같은 값이면 더 기특한 애를 뽑는 게 낫다. 그래서 그 놈의 변별력을 위해서 괴상한 문제를 내고 시간 싸움을 시키고 절박한 우리들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가지고 논다. 

그 과정에서 사회를 위해 별 하는 것도 없는 집단이 꽁돈 얻기가 부지기수다. 공공기관도 대기업도 이름만은 깔쌈한 변별력에 환장해서 토익 친구의 뒤를 봐준다. 그리하여 인간답게 살고 싶은 수험생은 두 분류로 갈린다. 900점에 눈이 먼 건실 청년. 어른들이 혀를 내두르는 600점 미만의 비행 청년. 나는 후자였다. 


집에 온 나에게 언니가 맛있는 걸 먹였지만, 여전히 토익은 머릿속을 가득 메운 골칫거리였다. 과정은 고통스러울 거라고 예상되고 당위성은 모르겠다.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예전처럼 회피하기에는 세월을 도로 뱉을 수 없다. 

그래서 말이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얼마간 조사를 거친 후 학과장을 찾아갔다. 졸업인증제를 없애주십시오! 일반 사업체가 아니라 공무원, 창업 등을 준비하는 학생은 토익을 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학생에게 부담만 씌우고 어쩌고저쩌고 몹시 나쁜 제도입니다. 제발 없애주시면 안 될까요…. 학과장이 칼 같이 거절할 거라고 겁먹었지만 의외로 잠자코 듣다가 교수들과 논의 후 통보한다고 했다. 추후 졸업인증제를 없애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날 하루는 정말 기뻤다. 적어도 졸업은 하겠구나! 조금 해방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게 끝은 아니더라고. 차후 진로를 고민하면서 취업상담실도 다니고 견학도 갔는데 내 스펙이 처참하단 사실만 뼈저리게 익혔다. 관심 있는 공공기관에 내 스펙을 갖다 대니 상담사 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것도 같다. 이대로는 (당연히) 힘들겠는데요…. 토익 900점 이상은 필수입니다. 


그랬다. 엄마를 기쁘게 만들려면 굴레 속에 굴러야 했다. 토익도 하고 컴활도 하고 한국사, 한국어, 대외활동 정리, 알바, 자기소개서, 면접 등 손을 놓았던 만큼 할 게 수두룩했다. 20대 초중반은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인가. 이때 착실한 지명이는 묵묵히 공부했겠지만 나는? 엄마와 큰이모 앞에서 돈 안 되는 창업을 하겠다며 징징댔었다. 올해는 일 배우겠다고 시민단체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이런 나도 궁극적인 꿈이야 있다. 그러나 게으름과 투쟁하고, 자꾸 패배하고, 불안에 잠식된다. 미래는 준비되지 않아서 언제나 불확실하고 꿈은 위태로워서 때때로 조마조마하다. 토익이 싫어서 한국이 싫고 스펙이 없어서 내가 싫어지게 만든다. 바보가 바보답게 살 수 없는 한국과 게으르고 멍청한 나 중에 내가 더 나쁜 것만 같다. 







20년도에 쓴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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