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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오션 Jun 02. 2023

에로스에 중독된 사회, 왜일까?

#0. 사랑에 대한 글쓰기 - 프롤로그

본격적으로 글을 전개해나가기 전에 이 글에서 다루려는 사랑의 범위부터 간단히 짚겠다. 사랑은 넓은 의미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마음, 친구 간에 서로 아끼는 마음, 이성 또논 동성 간에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마음 등 여러가지 형태의 사랑을 포함하는 단어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사랑은 성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에로스)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일상적으로 사랑이라 함은 좁은 의미에서의 사랑을 뜻하며 이글에서 말하는 사랑도 후자를 의미한다. 즉 나는 우리 사회가 에로스에 중독되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대중문화에서 우리 자신의 우울이나 꿈 같은 어떠한 다른 사념보다 사랑이 흔히 노래가 된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인기있는 대중가요는 십중팔구 사랑이나 너를 그리워하고, 대중시나 대중에게 인기를 얻은 몇몇 문구, 예를 들면 “삿포로에 갈까요. 이 말은 당신을 좋아한단 뜻입니다” 같은 소위 대중에게 먹히는 감성은 연심을 다루는 작품이 많다. 이렇듯, 사랑은 다른 감성적 주제보다 많이 회자된다는 걸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누군가가 시나 글을 지어보라고 하면 없는 누군가를 열심히 사모하고, 가끔은 문화를 향유하면서 마치 내가 누구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 같은 감상에 빠질까? 왜 그토록 사랑에 대해 이야기했는데도 또 이야기하고 마는 걸까?

 우선 나는 열정적인 사랑이 주는 짜릿함이 인간에게 엄청난 자극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열망하는 것과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일상의 그 어떤 행위보다 더 짜릿하며 가장 열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왜냐면 대부분의 2차 성징 이후의 인간은 번식본능에 의해 성적으로 결합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먼 옛날부터 이런 짜릿함을 느껴본 인류들이 수없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왔고 21세기 들어서 대중문화가 확산된 이례로 상품성을 위해서라도 사랑은 환상적으로 포장되었기에 사랑과 거리가 먼 자들도 사랑이 매우 친숙하고 같은 환상을 공유하며 또한 재생산하게 되었다. 

 또한 인간은 들뜨고 즐거운 상태 뿐 아니라, 고즈넉한 시간에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풍취에 빠지는 것도 정말 좋아한다. 감성과 예술과는 거리가 먼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도 가끔은 감성적인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데, 그때 그들이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의 영역이 바로 사랑이다. 모든 영혼에 깊은 흉터가 새겨진건 아니니 만인이 고립감과 외로움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사람마다 경험이 다르기에 다른 정서들도 대표 정서가 되기란 어렵다. 그에 비하면 웬만한 사회구성원은 직간접적인 사랑경험이 풍부할 수 밖에 없어서,서정적 감성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손쉽게 감동 받도록 해준다.

 게다가 사랑은 그토록 많은 주제확장으로 인해 비극도 아련한 추억회상도 환상도 다 포함하게 되어서 환상적인 사랑을 꿈꾸는 것과 그리움을 소비하는 것으로 얻는 서정적 감동 외에 카타르시스도 사랑을 통해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미련을 버린 전애인을 향한 만족적 아련함 또는 그리움을 통하여 느끼는 것을 서정적 감동이라고 한다면 서글픈 이별, 애달픈 짝사랑, 비련이 주제인 극을 통해 느끼는 심정은 카타르시스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이유를 추론하자면 개인주의 확산으로 인한 집단 와해가 원인 아닐까 싶다. 현대인, 특히 젊은 세대로 갈 수록 남에게 격식을 차리고 대한다. 개인적 영역과 개인생활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대학교에서 진정한 친구 사귀기 어렵다고 하지 않은가. 사회분위기를 완전히 체득하지 않은 어린시절에는 본인과 타인의 영역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서슴없이 대하기 때문에 내면도 공유하고 쉽게 친해진다. 성인은 남과 나의 인식이 같지 않는 걸 배웠기에 어린시절보다 조심스러워진다. 현세대 청년들은 거기에 더해 개인주의라는 사회분위기를 체득했으므로 사회적 예의를 개인주의적 사고에 맞춰 수립해나가며, 정체 모르는 타인은 함부로 쳐다보지도 않게 되었다. 그 예로 지하철에서 초면인 옆자리 노인과 말을 섞는 노인은 본 적 있어도 초면인 옆 청년과 자연스레 대화를 잇는 청년은 못봤지 않은가.  우리 사회는 능동성과 자율적 행동 등 개인주의의 좋은 점만 있는 게 아니다. 세계는 곳곳이 빈부격차와 소외로 멍들어있고 영역을 넓혀가는 경쟁 심화로 압박감을 겪는다. 타인의 고통을 일시적 포르노(?)로 소비하는 일이 흔하고 아이들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짓밞고 있다. 안정된 사회가 아닌 이상 당연히 개인주의의 폐해도 공존한다.  어쨌든 이런 병든 사회로 생긴 심리적 불안, 결합과 합일, 강한 연결과 소속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연인을 택한다. 친구나 가족 같은 다른 관계와 비교해서 사랑은 더 강한 결합을 상징해왔다. 이 병든 사회에서 배신이 두렵고, 인맥을 가지치기해서 선택하고, 개인 간의 공유집합이 갈수록 옅어져서 내면적 불안을 지인과 친구를 통해 달래기 어려워진다. 그러면 우리는 강한 관계인 연인에 집착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연인이 서로를 강하게 구속하는 것도 여기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요약하면 집단 와해로 인해 본래 있으면서 심화된 외로움과 결합 및 소속욕구와 내면적 불안을 해소할 길을 찾기 어려워져 연인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랑은 짜릿하고, 우리가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환상이 뚜렷하며, 직간접적 경험이 쉽기에 손쉬운 감성 향유가 가능하고, 사회변화에 따라 내면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거의 유일의 선택지이다. 이 글에서 펼친 이유 외에 또다른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요지는 사회가 중독이라 해도 될 정도로 사랑을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약 4~5년 전인 17년도 18년도 쯤에 사랑에 대한 글 프롤로그 격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제목은 <사람은 사랑을 사랑한다>

사랑에 대한 다른 글도 써서 시리즈 완성하고 싶다…. 

시리즈 제목은 <사랑에 대하여>로 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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