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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이례 May 10. 2021

우리에게는 서로가 필요하다

픽셀로 전해지는 그들과 나의 이웃은 얼마나 닮아 있나

요즘은 내 마음이 푸르른 나뭇잎 춤추는 여름의 손짓을 닮았는지 주변이 온통 산뜻하고 아릅답다. 실직하고 이렇게 정해진 것 없이, 달려갈 목적 없이 머물러 있는 시간을 지독하게 싫어하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보통 내외부 자극에 대한 감정 조절에 실패하여 일희일비 하는게 좀 더 익숙한 패턴인데 말이다. 


최근은 소셜미디어나 디지털 컨텐츠 소비를 조절하는 동시에 우리들의 이웃, 커뮤니티, 상생 등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고 그러던 중 내 마음을 울린 두 사건이 요즘 나를 잔잔하게 지배하고 있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오늘 미디어 외이례는 이 두 가지 사건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4월 25일, 젊은 청년이 한강 주변에서 실종되었다. 결국 5일이 지난 30일 민간구조사로 인해 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고 5월 5일 어린이날에 아버지 손을 떠나 하늘 나라로 긴 작별 인사를 했다. 5월 8일 어버이날에 정민군의 아버지는 자식같은 정민이 또래 친구들, 본인 역시도 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결혼을 앞둔 신부, 그리고 수많은 국민들에게서 오늘만큼은 위로라는 꽃말을 새긴 카네이션과 함께 손편지들을 선물받았다.


출저: 아버님 블로그 (https://blog.naver.com/valky9/222333704026)
출저: 아버님 블로그 (https://blog.naver.com/valky9/222333704026)
출저: 아버님 블로그 (https://blog.naver.com/valky9/222333704026)


아버지는 평소 운영하던 본인의 블로그를 통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공유했고, 걱정어린 국민들과 직접 소통을 해나갔다. 우리는 이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옛날 방식의 매스 미디어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다. 이를 통해 하루 아침에 갑자기 유족이 된 한 사람의 이야기를 뉴스보다 먼저 직접 전해듣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새롭게 느껴졌다. 댓글들을 살펴보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다. 대중들도 마침 블로그를 하시던 중년의 아버님이 직접 편지를 보내듯 누구보다 생생한 내용을 전달해주셔서 정보 전달자를 따로 거치지 않고 유족과 직접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듯 했다. 이전에 우리는 이런 일들을 일방적으로 뉴스를 통해 받아들였고, 우리는 권력의 피라미드 위를 웃돌고 있지 않는 이상 그저 사태의 변화를 주는대로 받아보는 입장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다.


출저: 아버님 블로그 (https://blog.naver.com/valky9/222333704026)
출저: 아버님 블로그 (https://blog.naver.com/valky9/222333704026)


무엇보다 픽셀을 통해 전해지는 응원의 목소리들을 통해 마치 내가 당사자라도 된 듯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고 있지만, 픽셀이웃들도 아침마다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안녕을 묻는 내 유년기의 이웃들을 떠올리게 했다. 저들은 정민이를 손수 그린 사람이었고, 성치 않은 손으로 삐뚤 빼뚤 손편지를 써보낸 사람, 그리고 자신을 97년생 평범한 서울시민이라 칭하는 한 청년이었다.




유퀴즈 온더블럭이라는 프로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근이라는 커뮤니티 활성화 플랫폼이 엄청난 기업 가치를 자랑하는 회사가 된 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 나는 사람들이 지극히 개인적인 삶을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우리를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이웃 또는 커뮤니티와의 공존, 그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감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우리의 존엄한 가치를 살아내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들을 수 있는 유퀴즈를 즐겨 본다. 최근 한 판사님이 나오셨는데, 로스쿨 진학 중에 갑작스러운 의료사고로 수술대 위에서 어이없게 시력을 잃어버린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분이었다. 사고 이후로 다시 집 밖에 나가보고, 버스를 타고, 지하철도 환승해보며 천천히 일상의 것들을 하나씩 찾아오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는가를 강조하며 어머니 얘기때도 굳게 참아냈던 눈물을 끝내 터트리던 모습이 눈에 맴돈다. 



굳이 익숙했던 종이 노트가 아닌 전자 노트북으로 필기를 대체해 파일을 나누어주고, 원본파일이 없는 책은 타이핑해주었던 주변의 귀한 노력이 깃든 책의 가치를 알기에 시력을 잃은 후로 오히려 성적이 올라 우등생으로 로스쿨을 졸업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마음씨 고왔던 주변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는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나는 이 대목을 서너번 돌려보며 그 여운을 간직하고자 했다.


지금의 이웃은 이사오면 네모난 시루떡을 나눠주지는 않아도, 여전히 사각형 픽셀 너머에서 마음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판사님의 친구들처럼 물리적으로 모두 곁에 존재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의 진실어린 목소리가 모여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도 되고, 진실을 밝히는 등대가 되기도 한다.


나는 우리들이 디지털화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이렇게 서로에게 보내는 관심이 우리를 살게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는 침범받지 않는 무한한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며 그것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거라 믿고 있는가. 당장 사회적 책임과 윤리에서 조금 더 벗어나는 것을 통해 즉각적으로 느끼는 혼자만의 편리함에 속고 있지는 않는가. 하지만 이 글을 보는 모두가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지난번 여운이 긴 찐한 행복을 느꼈을 때 과연 우리는 혼자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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