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물관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안내를 맡은 전시 <입정하다>의 큐레이터입니다. 이번 기획 전시의 제목 이름은 <입정하다>입니다. 이곳은 ‘입정동’입니다. 여러분 전에 이 동네에 와 보신 적이 있나요? 어디 가보셨어요? 힙지로의 인스타 맛집이나, 평양냉면 먹으러 을지면옥이나 맥주와 노가리를 먹으러 을지오비베어가 있는 노가리골목에 가보신 분들이 많네요. 그런데 이곳에는 또 다른 곳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 ‘입정동’입니다. 저희는 이 입정동 위에 박물관을 만들었고 그것을 오늘 여러분께 선보일 예정이에요."
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신한생명 본사 1층 로비 . 서울 중구 장교4지구에서 발굴.
"입정이 무엇이냐고요? ‘입정’ 이 이름 자체에도 참 많은 시간과 역사가 숨겨져 있는데요. 지하철로 오셨다면 아마 을지로 3가 역에 내리셨어야 했을 텐데요. 옛날에 이곳에는 갓을 만드는 갓방들이 있었는데요. 갓방 만드는 집에 ‘우물’이 있어 이곳을 ‘갓방 우물골’, 즉 한자로 ‘입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그래서 이 지역은 일제 강점기 때 입정정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다, 또 해방 이후 우리식으로 입정동, 그리고 또 그 이후에는 을지로 3가, 4가, 5가로 불려지게 됩니다. ‘입정’이라는 이름은 그 수많은 시간들을 담고 담아 남겨진 이름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자, 저희가 준비한 첫 번째 작품입니다. ‘창문 너머 입정동의 시간’을 함께 바라보겠습니다. "
"곳곳의 낡은 건물, 그 주변에 세워진 최첨단 고층 건물들을 함께 둘러봐주세요."
"그리고 이제 여러분에 손에 담긴 지도를 한번 바라봐주세요. 지도는 총 3장입니다. 첫 번째 지도는 1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한성부지도입니다. 두 번째 지도는 홍콩반점 사장님이 배달을 위해 만든 지도로 2002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도에는 몇 년 전 개발로 사라진 가게들과 현재도 살아있는 가게들의 이름이 함께 남겨져 있습니다. 세 번째 지도는 최근의 지도입니다. 그리고 바깥에 보이는 풍경이 오늘의 입정동입니다. "
"곳곳에 부서지고 있는 모습들이 보이시나요. 지금 보이는 오래된 건물들이 부서지고 고층 아파트들이 생겨나면 또 앞으로 새 지도가 만들어질 겁니다. 거대한 세상의 변화와 결정 앞에서 새로 지어지는 건물들 앞에서 저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이곳에 새롭게 무언가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시간을 예술로 기록한 박물관이요. 이 입정동이라는 곳에 ‘멈춰’ 있는 것이 아닌 여전히 ‘하고’ 있는 무언가를 예술로 작품으로 담아냈습니다. 그래서 이 전시의 제목이 ‘입정하다’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난 시간들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입정에서 하고 있는 것들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저희가 박물관을 만든 이유입니다."
2. 고고학자의 방 - 돌멩이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자, 여기 닫혀있는 방은 입정동 유적들을 연구하고 있는 고고학자의 방입니다. 먼저 다른 작품들을 살펴보기 전 고고학자의 연구실에 들어가 지금 이곳에서 진행 중인 연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입정 박물관의 고고학자입니다. 사실 저는 계속 발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발굴’이라는 개념은 결국 유적을 복원함으로써 과거의 삶을 기억하고 또 재생하는 데 있는데요. 이곳은 과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장님들의 현재 살아 움직이는 물건들과 순간들을 과거로 남겨도 되느냐에 문제 있어서 실례가 아닐까, 이것이 가능한 문제인가 질문이 들기 때문이죠. 그렇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며 이 근처를 돌아다니던 중, 이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
"제 주변에 돌멩이들이 굉장히 많죠?"
"이 돌멩이는 1950년대에 포장된 도로 길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이 돌멩이는 1960년대에 지어진 가게의 계단 턱으로 사용된 시멘트에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 돌멩이는 1970년대에 지어진 가게의 벽에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 돌멩이는 2021년에 건물이 부서지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이렇게 곳곳에 많은 돌멩이들이 떨어져 나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돌멩이에 대해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연구의 제목은 '돌멩이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입니다."
"어떤 공간이 지어지는 것은 점 하나로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런 돌멩이 같은 것들이요."
"점들이 모여 선이 됩니다. 선이 모여 한 면이 되고 그 면들이 모여 벽들이 만들어지고 그럼 한 공간이 됩니다. 공간들이 모여 마을이 만들어지죠."
"그런데 이곳의 상황이 어려운 이유는 이렇습니다. 거대한 콘크리트, 어디서 온지도 모르는 갑작스러운 건물 하나가 덜컥 생겨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마을을 한 번에 눌러 면으로 만들고...."
" 또 찢어서 선으로 만들고....."
"또 갈기갈기 찢어 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렇게 곳곳에 작은 파편들이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곳곳에 버려진 플라스틱 조각, 종잇조각, 유리조각, 돌멩이 같은 것들이요. 한 가게에서, 가게의 한 면에서, 선에서 쪼개져 나온 점들입니다. 이곳에 이렇게 작은 점들이 많습니다. 저는 이 점들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는 이것을 쓰레기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제가 이곳에서 현재 발굴할 수 있는 것들은 이 점들뿐입니다. 이 점들 하나하나가 온전했던 때를 떠올립니다. 건축의 한 이론에 나온 것처럼 정말 이 작은 조각들이 모여 원래대로 혹은 더 멋진 무언가를 만들어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돌멩이들을 복원하려고 하는 과정을 통해 이 질문의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3. 입정동 공정 과정 설명 -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
"이곳은 입정동의 공정들을 전시한 곳입니다. 저희가 직접 이 과정을 보다 자세히 설명해 줄 수 있는 사장님을 직접 모셨습니다. 함께 이야기 들어보실까요? 설명을 들으시면서 공장들을 보시는 것도 잊지 말아 주세요."
"공정은 한 제품이 완성되기까지 거쳐야 하는 하나하나의 단계를 말해. 목형, 주물, 단조, 선반, 절삭, 밀링, 용접, 빠우, 칠 순서로 이루어지고, 이 입정동은 다른 곳과는 다르게 공정 과정이 모두 연계되어 있던 곳이라, 짧은 시간 안에 물건을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청계천에서 탱크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 것이야."
"목형은 금속으로 만들기 전에 나무를 깎아서 모형을 만드는 거예요. 모형으로 주물틀을 만들고 거기다 쇳물을 부어서 만들면 그게 금속결과물이 되는 거지 여기서 치수가 중요해 목형을 설계도대로만 만들어서 틀을 만들면 나중에 쇳물을 붓고 굳혔을 때 사이즈가 줄어버리거든.. 그거까지 계산해야 돼. 그게 기술이야. 그래서 나무지만 금속 정밀 작업이다. "
"주물은 방금 그 목형으로 만든 틀에 알루미늄 같은 걸 녹인 쇳물을 부어서 금속으로 만드는 거야. 여기선 열을 잘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한 번에 부으면 안 되고 조절을 잘해서 부어야 하지."
"정밀가공은 기계금속공업하면 떠오르는 것들. 금속을 자르는 절단, 깎아내는 절삭작업. 여기 간판들 보면 선반, 밀링, 로구로, 벤치레스 이게 다 정밀가공 하는 데야. 자기들이 사용하는 기계를 간판에다 걸어 놓은 거지. "
"용접은 용접봉을 녹여가면서 금속이랑 금속을 붙이는 작업이야. 이 동네는 대부분 아르곤 용접해. 이게 잘못하면 용접봉만 녹는 것이 아니라 붙이려는 쇠가 녹을 수 있기 때문에 이거 조절을 잘해야 해."
"프레스는 일단 주문받은 문양을 새긴 틀을 만들어서, 프레스 기계에 장착하고 재료 금속에다가 말 그대로 때리는 거야. 그럼 문양이 찍히는 거지, 그 모양이 되거나.. 벳지나 메달 같은...."
"시보리는, 스피닝이라고 돌아가는 선반에 금속판을 끼워서 같이 돌려. 그리고 주걱처럼 생긴 거로 그 돌아가는 쇠를 밀어가면서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작업인데... 왜 도자기 만들 때 보면 물레에다가 찰흙 놓고 돌리잖아요? 그때 손으로 힘주면 모양이 만들어지잖아? 그 원리로 쇠모양을 내는 거야."
"광내기는 buff의 일본 발음인데 금속의 표면에 광택을 내고 매끈하게 하는 거.. 구둣방 가면 신발 문지르잖아 아니면 자동차 광택 낼 때 기계로 문지르잖아... 가는 거... 금속공정의 마무리 작업이지... 색칠하기 직전이거나."
"칠, 도장은, 말 그대로 완성된 물건에 색칠하는 작업이야. 대부분 한 번에 피막, 코팅할 수 있는 분체도장을 많이 해. 여기 간판에 ~칠, ~분체, 컴프레샤, 후끼가 다 칠, 도장하는 곳이야. "
4. 한 배우의 이야기 - 우리 아빠가 떠올라요.
"저희 아빠가 떠올라요. 아빠는 충남 계룡에서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했어요. 겨울에는 농사일이 없으니까 아빠는 동생을 보러 서울로 놀러 갔다가 동생이 그 당시 패물, 금이 활성화 되던 시대라 귀금속일을 해보는 게 어떠냐는 말에, 평소 손재주가 좋았던 아빠는 28살에 30만 원을 받고 귀금속일을 시작했대요.
서로 협력해서 부품을 만들고, 기계를 만든다는 말이 아빠가 일하던 방식과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금은방 가게에서 손님들이 물건을 주문하면 아빠가 금거래소에서 금을 사서 14k/18k로 나눠 금을 녹여 반지모형을 만들어주는 주물집에 넘겨주고 반지모형이 다 만들어지면 다시 아빠한테 전달되어 아빠가 모형을 깎고 다듬고 광내고 큐빅을 붙이고 하는 작업을 하여 완성품을 다시 가게에 넘기고 손님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면서 그렇게 점점 가게를 넓혔대요.
아빠는 일을 시작하면서 저희 엄마를 만났대요. 그리고 엄마한테 잘 보이기 위해 밤새 일을 하면서 실력을 높였고요. 또 계속해서 일을 하시면서 사장님이 되고, 또 엄마와 결혼했고, 또 제가 태어났고, 그 시간 동안 아버지는 계속 한 공간에서 일을 했어요. 지금도 계속하고 계시고요. 그런데 이렇게 가게 문들이 닫혀있는 걸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
5. 입정동 골목길 속 남겨진 흔적들 - 입정동 생활상
"잠시 위를 올려다보겠습니다. 석면해체 공사가 진행되면서 본래의 모습이 드러난 한옥 지붕입니다. 사실 이곳에 재개발 이야기가 나온 것은 몇십 년 되었습니다. 한옥 주인들은 곧 개발될지 모른다며 비가 새도 지붕을 수리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장님들이 임시방편으로 기존 한옥 지붕 위에 슬레이트와 비닐을 덧댄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없어 쌓여가는 고지서들입니다. 이곳에는 이러한 의미 없는 조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옥 주인들은 세를 더 받기 위해 화장실까지 없애면서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입정동에는 수도시설도, 화장실도 없어 군데군데 사장님들이 직접 화장실을 만들었습니다. 걷다 보면 길 중간중간 화장실이나 수도꼭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소변 금지는 아마도 화장실을 찾지 못한 이들이 이곳을 화장실처럼 쓰면서 화가 난 누군가 쓰지 않았을까요. "
"사장님들이 퇴근할 무렵 이렇게 다방 이름이 적힌 생수 병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는 수도시설이 없어 다방사장님들이 서비스로 그러니까 무료로 아침마다 생수를 가게 앞에 배달해 주고 수거해 갑니다. 생수뿐만 아니라 수건도 무료로 세탁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근처 다방에 가보면 세탁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 ‘한때’는 그랬었지 - 과거로 돌아가 공간에 남겨진 에너지 느끼기
"아이들이 놀고 있나 봅니다. 닫혀버린 가게들 사이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공간이 활기차지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이게 무슨 놀이죠? 사방치기. 지역에 따라 땅따먹기, 가위팔방, 아기사방, 달고나, 띠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 동네에는 815 광복 이후, 피난민과 서울로 상경한 수많은 빈민들이 모여 판자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토사와 쓰레기, 판잣집에서 나오는 생활하수로 인해 청계천은 오염이 심해져 아스팔트로 청계천을 메웠고, 주변에 가득했던 판잣집들은 사라지고 현대식 건물들이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평화시장, 세운상가입니다. 이로 인해 대표적인 낙후 지역이었던 동네가 우리나라 산업의 중심지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자연스럽게 과거에 놀던 아이들도 다른 곳으로 가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또다시 이 공간들이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뛰어놀았던 그 에너지들은 여전히 이곳에 그대로 남아있을 겁니다. "
"이렇게 과거와 현재, 옛 건물과 새로 지어지는 건물이 어떻게 함께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어우러질 수 있을까요?"
7. 살아있는 조각상 - 남겨진 물건들은 어디로 가나요?
" 지금 보고 계시는 조각상은 1950년대 말 아직 입정동이 기술의 성지로 발전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상입니다. 그러니까 입정동의 시간들을 모두 본 조각상입니다. 조각상이 움직이네요. 지금 지어지고 있는 아파트 너머로 세운상가가 있는데요. 1972년에 세운상가가 완공이 될 때쯤부터 조각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면서 ‘살아있는 조각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변 사장님들이 하나 둘 떠나고 사람들의 소리가 줄어든 요즘에는 소리 없이도 혼자 움직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재개발이 진행되면 이 조각상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또 이 조각상 말고도 남겨진 수많은 것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일까요? "
8. 나사가 빠져버린 기계 - 고장 나 버린 입정동의 모습들
"여기 홀로 남겨진 기계가 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입정동의 공정은 사장님들의 협업 과정으로 이뤄져 왔는데요. 재개발을 앞두고 떠난 곳도, 남아있는 가게도 있습니다. 가게들이 흩어지게 되면서 여러 사장님들이 함께 부품이나 기계를 만들던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거리 곳곳 비워진 가게를 보며 활발했던 입정동을 가늠해 볼 수 있을 뿐입니다. "
9. 새 임시건물 : 잔치
"저희 박물관의 마지막 작품은 ‘잔치’입니다. 입정동에서는 정월대보름이면 사장님들이 모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고기도 굽고 노래방 기계를 놓고 노래도 부르고. 하지만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더 이상 잔치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잔치’가 이제는 과거를 기억하는 한 작품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건물은 임시건물로 아직 자리를 자지 못한 사장님들이 임시방편으로 이곳에 이사를 하고 있습니다. 또 8월이면 산림동에 짓고 있는 건물로 이전해야 합니다. 오랜 시간 터전으로 삼은 일터를 떠나 새로운 건물로 이사하는 사장님들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빌어주는 마음을 담아 잔치를 재현했습니다. <입정하다> 전시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