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삶 A01] 질문 앞에 머무는 용기

by 보름
@안중근의사

국민 영웅으로 불리는 안중근 의사의 장남 문생은 일곱 살에 독살 당했다. 차남 준생은 평생 가난에 시달렸고, 아무도 일자리를 주지 않아 결국 아편상을 하다 약쟁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일제의 회유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죄했다가 백범 김구에게 처단 대상으로 지목되었고, 결국 한일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은 채 전쟁통에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인생이 있다.


친일파 민영휘.


그는 민 황후의 먼 일족이었으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벼슬길에 오르자마자 부정부패를 일삼았고, 일본 영사관 보고서에 따르면 집안 시녀 수십 명을 부자들에게 팔아넘기고 그 수익을 챙기기도 했다. 사실상 포주 노릇을 한 셈이다.


그 당시 이완용의 재산이 300만 원이었는데, 민영휘는 그 스무 배가 넘는 6,000만 원을 모았다. 얼마나 돈에 환장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원래는 친청파였지만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세력이 커지자 돌연 친일파로 돌아섰다. 과거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이름까지 바꿔 민영준에서 민영휘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결국 그는 친일 행적을 인정받아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고, 이후 축구장 8000배 크기의 땅을 사들였다.


그렇다면 그의 자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실제로 손자 민병도는 “조부의 죄값을 갚겠다”는 마음으로 을유문화사를 세워 한국 문화와 역사를 바로 세우는 데 힘썼다.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예원학교와 서울예고 설립을 지원하기도 했다. 훗날 중앙은행 총재가 되었고, 1965년에는 버려진 남이섬을 사들여 수천 그루의 나무를 심어 오늘날 한류 관광지로 만들었다. 이런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 모든 기반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생각하면, 마냥 박수치기 쉽지 않다.


민영휘의 증손자 민헌기, 서울대 의대 교수 역시 당대 최고의 의사였다. 1974년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했을 때 수술을 지휘했고, 1979년 10.26 사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시신도 수습했다.


짐작컨대, 그 외 많은 후손들 또한 축적된 부와 인맥을 바탕으로 각자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사회 지배층의 일원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적어도 그들은 어린 나이에 독살당하는 운명만큼은 피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라면 어미로서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너라면 남편이 어떤 선택을 하길 바라겠느냐고.

너라면 아버지가 어떤 길을 걷길 원하겠느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대신, 일족이 평생 고난과 가난 속에서 살아가게 할 것인가.

아니면 악인이라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당대의 부와 권력을 누리며 자식들을 최고의 환경 속에서 자라게 할 것인가.



이 질문 앞에 서자,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쉽게 비난할 수가 없었다. 잘잘못이야 누구나 알지만, 나라고 해서 잔혹한 이기심이 한톨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제 나는 너에게 묻는다.


할아버지의 죄값이 크다 해서 자손들까지 평생 편견과 비난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무엇이 더 옳은 결론일까.


그래, 나는 끝내 답을 내리지 못했다.


너 역시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눈을 깜빡이는 구나.


용서는 정의를 무디게 만들 수 있고, 단죄는 후손에게까지 씻을 수 없는 굴레를 씌우는 것일테니.

어느 하나가 단순히 옳거나 그르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풀리지 않는 수학 방정식처럼, 누군가의 손쉬운 답안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영역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과 상황에 대해, 특히나 정치 현상에 대해 빠른 답을 갈망한다.


“옳다, 그르다.” “용서해야 한다, 단죄해야 한다.”

하지만 너무도 쉽게 내린 결론은 결국 또 다른 누군가를 상처 입히고, 새로운 불의를 낳을 위험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적는다.


섣부른 확신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우리가 갈구해야 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끝없는 질문 앞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머무르는 용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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