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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3시간전

아니, ‘런던베이글’ 말고요

런던에서 먹는 베이글


'오늘 뭐 먹지?'


머나먼 타국으로 날아왔지만 여전히 음식을 고민 중이다. 역시 나는 먹으려고 사는 인간이 맞나 보다. 함께 메뉴를 의논할 사람이 없는 탓에, 자주 사용하던 ‘아무거나’라는 치트키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전적으로 맡겨진 식사 선택권이 버겁게 느껴진다.


영국에 갔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했다. 음식은 정말 별로였다고 말이다. 가장 맛있었던 것이 베트남 쌀국수라고 하니, 이 정도면 더 물을 것도 없었다. 소득 없는 질문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런던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낙으로 사는 걸까. 인생의 좌우명이 '잘 먹고 잘 살자'인 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도시였다. 가장 중요한 먹는 즐거움이 빼앗긴 곳. 고유 음식보다 타지 음식이 더 각광받는 나라. 강경 한식파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음식이 있었다. 이걸 음식이라고 칭해도 될까 싶었지만…. 당최 먹을만한 게 없는 여행지라 과감하게 식사 카테고리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바로 ‘베이글’이다. 몇 해 전부터 선풍적 인기를 끌던 '런던베이글뮤지엄' 카페 때문에 '런던=베이글'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박혔다. 파리 하면 바게트, 런던 하면 베이글. (알고 보니 베이글의 본고장은 런던이 아니었다. 그냥 마케팅이었을 뿐.)






어제 막 런던에 도착했을 때 뉘엿뉘엿 지고 있던 해는 짐 정리를 마치고 나니 아예 숨어버렸다. 배고픔보다 낯선 도시의 밤이 더 무서웠던 나는 결국 외출을 포기했다. 숙소 앞 햄버거 가게를 뒤로하고 집에서 챙겨 온 누룽지를 야금야금 씹어먹으며 대충 허기를 달랬다. 그러니 오늘 아침밥이 런던에서의 첫 식사가 된다.


첫 끼니로 가장 궁금했던 베이글을 먹기로 했다.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0에 수렴하는 도시지만 기본적으로 빵은 맛이 없을 수가 없다. 더구나 한국에서 우연히 먹었던 런던베이글은 꽤나 맛있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과연 현지에서 먹는 베이글 맛은 어떨까?


숙소를 나서기 전, 베이글 맛집을 검색했다. 그런데 가히 한국에 있는 런던베이글의 위상은 어마어마했다. 네이버는 런던에 와있는 나를 종로와 압구정으로 이끌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런던에 있는 빵집은 나오지 않았다.


종로와 압구정에 있는 런던베이글


런던베이글
런던, 베이글
런던 베이글 맛집
London Bagle


검색어를 달리해봤지만 결과는 동일했다. 여전히 나는 서울에 갇혀있었다.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은 구체적인 문장을 적었다.


런던에서 먹는 베이글


아, 이제 검색이 된다.






그리하여 첫날 아침에 찾아간 곳은 ‘비 베이글(B Bagle)’이다. 이곳은 체인점이다. 런던의 번화가를 다니다 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지만, 막상 생각보다 마주치기 어려운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다. 그래서 결론은 뭐다? 우연히 마주치면 사 먹자! 그건 운명이다. 베이글을 먹을 운명.


이곳에는 아침 메뉴가 있다. 조식 뷔페 따위 없는 민박에 묶는 나에게 아침식사는 또 하나의 과제였다. 여기서는 베이글과 음료를 만 원대의 가격으로 맛볼 수 있다. 빵 한 조각과 작은 커피 한 잔에 만원이 훌쩍 넘어가는 것이 무슨 장점이냐고? 런던의 미친 물가 속에서 이 정도면 혜자 중의 혜자다.


아침 대용으로 먹을 메뉴가 뭘까 하다가 오믈렛 베이컨을 주문했다. 매장에서 먹고 가겠다고 했는데도 직원이 베이글을 곱게 포장하여 건네준다. 영수증을 보니 take-out 가격이 찍혀있었다.(매장에서 먹는 건 더 비싸다.) 문제는 내가 취식 장소를 바꾸고 추가 결제를 할 정도로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급하게 밖에서 먹는 것으로 계획을 바꾼다. 괜찮아! 바깥구경도 하고 좋지! (사실 이날은 무지 추웠다.)



한참 걷다 보니 한적하고 작은 공원이 나온다. 아무도 없어서 조금 무섭긴 했지만, 더 이상 헤맸다가는 베이글이 차가운 돌덩이로 변할 것만 같았다. 작게나마 햇살이 비추는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옷 안에 품고 있던 베이글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방금 뽑은 가래떡만큼 쫄깃한 빵, 겹겹이 쌓여 공기층을 이루는 계란, 텃밭에서 따온 것 같은 신선한 로메인, 정체 모를 하얀 소스까지. 이 조합은 아주 완벽했다. 단순히 배가 고파서 느끼는 만족감이 아니었다. 이렇게 인생 베이글을 만나는 건가. 나는 곧바로 다짐했다.


앞으로 런던에 있는 동안 ‘1일 1 베이글’을 하겠다고.






나와의 약속대로 다음날도 베이글가게로 향했다. 이번엔 쇼디치 근처에 있는 ‘베이글 베이크(Beigel Bake)’다. 이곳의 베이글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는 다르다.  크림치즈도 블루베리잼도 발라져있지 않다. 오로지 소고기와 연어로 투박하게 만든 유대인식 베이글이다. 바로 이거다 싶었다! 이는 분명 한국에 없는 맛이다.



멀리서도 눈에 뜨일 만큼 큼직하게 쓰인 빨간 알파벳들. 신명조로 적힌 듯한 꾸밈없는 글씨체. 외관부터 느껴지는 무심함이 내 기대감을 또 상승시켰다. 저런 간판을 달아놓은 가게는 적어도 평타 이상이다.


이른 아침부터 끝없이 찾아오는 손님들. 소문을 듣고 온 나 같은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뒤섞여 줄을 선다. 블로그에서 배운 대로 인기메뉴인 ‘Salt Beef Beigel(절인 소고기가 들어간 베이글)’을 주문했다.


“머스터드와 피클도 같이 넣어드려요?”

직원이 묻는다.


“네!”

이 역시 블로그에서 배운 대로 답했다.




툭툭 썰어진 소고기, 기다랗게 잘린 피클, 샛노란 머스터드소스. 그리고 이것들을 감싸는 작고 쫄깃한 빵. 어디선가 ‘노동자들이 먹는 베이글’이라는 후기를 봤는데 그 표현이 제격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노동자 출신의 여행객이 아닌가. 잠시 노동자의 모습으로 돌아가 베이글을 베어 물었다.


아무 간도 되어있지 않은 빵, 이보다는 더 짭짤하지만 여전히 심심한 고기, 식초물이 잠깐 스쳐간 듯한 피클, 두피를 쪼그라들게 만드는 매운 머스터드소스까지. 생소하지만 맛있다고 극찬하기에는 애매한 베이글이었다. 분명 어제의 베이글과 같은 매혹적인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못생기고 퍽퍽한 베이글이 생각나는 걸까.

다시 런던에 가게 된다면, 우연히 근처를 지나게 되면,

이 투박한 빵을 다시 먹어보리라. 런던의 노동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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