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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Nov 16. 2024

런던까지 와서 뮤지컬을 봐야 해?

3시간짜리 영어 듣기 평가


“런던에 가면 뮤지컬은 꼭 봐야 해”


다들 이렇게 말했다. 런던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도,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피시앤칩스를 꼭 먹어봐야 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특이하게도 뮤지컬에 관한 한 모두가 호들갑이었다. 마치 런던 특산품이라도 되는 듯했다. 나는 떨떠름하고 뚱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왜 멀리까지 가서 뮤지컬을 봐야 하는가. 2시간이 넘는 공연을 왜 여행 일정에 포함시켜야 하는가. 그 이유를 물었고,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싸니까! 참으로 명쾌한 답변이었다. 잘만 하면 한국에서 파는 티켓의 반의 반 가격으로 공연을 볼 수 있단다. 이건 돈을 쓰는 게 아니라 버는 거라나? 그들은 기적의 논리를 마구 강조했다.

 





뉴욕에 브로드웨이가 있다면, 런던에는 웨스트앤드가 있다. 뮤지컬에 문외한인 나도 브로드웨이 정도는 들어봤다. 한데 웨스트앤드는 초면이었다. 한마디로 나에게는 듣보 같은 존재였다. (예술과 문화에 대한 내 무지함이 상당함을 다시 한번 느낀다.)


마치 우리나라의 경리단길을 패러디하여 온 동네 길목에 ‘-리단길’을 붙여대는 것처럼, 웨스트앤드도 브로드웨이를 벤치마킹한 게 아닐까? 알고 보니 웨스트앤드는 브로드웨이와 더불어 뮤지컬의 메카로 불리는 곳이었다. 그리고 런던은 뉴욕과 함께 뮤지컬의 본고장으로 여겨지는 도시였다. 나는 왜 런던이 예술과 거리가 먼 도시라고 단단히 오해했을까.


뮤지컬의 본고장에 가면서 공연을 보지 않는다? 하물며 반의 반도 안 되는 가격임에도 티켓을 사지 않는다? 이건 꽤나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런던까지 가서 빅벤이나 타워브리지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찝찝함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뮤지컬 관람이 영 내키지 않았다. 첫 번째 이유는 취향 문제다. 사실 나는… 뮤지컬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땅의 수많은 뮤지컬 애호가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발언임을 안다. 괜찮다. 나도 그들이 왜 그리 뮤지컬에 열광하는지 공감하지 못하니까.(후훗)


어떻게 뮤지컬을 재미없어 할 수가 있냐, 혹시 유명하지 않은 작품을 관람한 게 아니냐, 실력 있는 배우가 나오는 공연으로 다시 보는 게 어떠냐 등등. 뮤지컬에 대한 무관심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그런데도 좀처럼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두 번째로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내 인생의 영어공부는 대입을 위한 수능과 취업을 위한 토익이 전부였다. 읽기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말하기는 턱없이 부족한 전형적인 한국식 영어를 습득해 왔다. 외국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자막이라도 있지. 뮤지컬은 그것도 없잖아? 이건 돈 내고 고통받는 '내돈내산 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 여행...

뭔가 다르게 살아보고 싶어서 가는 거 아닌가?


문득 방랑의 목적을 다시금 되뇌었다. 늘 하던 대로, 내 입맛대로, 소나무 같은 취향을 고집할 거면 뭣하러 런던까지 가는 걸까.


‘여기까지 와서 굳이?’가 아니라,

‘여기까지 왔으니 한번!’이라는 마음가짐을 장착하기로 했다.


그래! 뮤지컬 진행시켜!






런던에서 뮤지컬을 예매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제 값을 주고 간편하게 표를 사거나, 번거롭고 수고롭게 할인 티켓을 구입하거나. 나는 고민 없이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매지컬 먼데이(Magical Mondays)‘라는 제도를 발견했다.


한국 기준으로 월요일 저녁 8시, 디즈니 뮤지컬을 단돈 29.5파운드에 볼 수 있는 마법 같은 기회가 열린다. 한화로 환산하면 5만 원도 되지 않는 금액. 더 파격적인 것은, 모든 좌석의 가격이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운이 좋으면 VIP좌석도 얻을 수 있다. 정말이지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이벤트다.

 

나는 가장 오래되고 잘 알려진 작품을 감상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고른 뮤지컬은 바로 '라이온 킹'이다. 예정대로 월요일 8시가 되자 예매창이 켜졌다. 후다닥 좌석을 선택하고 결제를 하려는데 자꾸 오류가 뜬다. 엇... 왜 안되지? 마음이 점점 조급해졌다.


뮤지컬에 별 관심 없다던 심드렁한 사람은 온 데 간 데 없고, 발을 동동 구르는 열혈 관람객만이 남아있었다. 좋은 좌석들은 점점 사라지고, 갖고 있는 카드들은 전부 승인이 거절되는 상황. 마지막 카드로 겨우 결제에 성공했다. 그것도 무대 바로 앞자리로! 이번 여행, 뭔가 예감이 좋은데?






그렇게 예매한 티켓이 어쩌다 보니 여행 첫날 공연이었다. 누가 보면 런던에 오자마자 이것부터 볼 정도로 뮤지컬에 환장한 사람인 줄. 헛헛한 웃음이 났지만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나는 제대로 된 여행 계획도 없는 도망자가 아닌가. 적어도 오늘은 할 일이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웨스트앤드 근처에 다다르니 각각의 포스터로 장식된 건물들이 보인다. 위키드, 겨울왕국, 해리포터 등등. 공연마다 전용 극장이 있다니. 역시 본고장의 스케일은 달랐다. 저 멀리 내가 관람할 라이온킹 전용 공연장도 보인다. 노란 배경에 새겨진 사자 그림이 건물 외벽을 가득 감싸고 있었다.

 

가방에서 주섬주섬 프린트해 온 티켓을 꺼내어 입구를 지키는 직원에게 건넸다. 공연 날짜와 좌석을 확인한 그는 내게 한마디 말을 남겼다.


"오! 좋은 자리 예매했네"


갑자기 한 껏 어깨가 올라갔다. 과연 얼마나 좋은 자리길래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이 뮤지컬을 몇 번이고 거쳤을 직원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보나 마나 엄청난 좌석인 게 분명하다. 단돈 5만 원에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입꼬리가 힘차게 상승했다. 물론, 공연장 안으로 입장하기 전까지만....

   





내부로 들어가니 상상과는 다른 모습이 펼쳐졌다. 여유롭게 술과 팝콘을 주문하는 관람객들. 여기가 동네 영화관인지 뮤지컬 공연장인지 헷갈렸다. 이들에게 뮤지컬은 어쩌다 마주하는 이벤트가 아니라 흔한 일상인 것 같았다.

 

공연장은 총 3층이었다. 나는 위풍당당하게 1층으로 출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더 기세등등하게 1열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가까워도 너무 가까웠다. 무대를 볼라치면 고개를 한껏 들어야 하는 정도였다. 30년 넘게 지속된 거북목이 단숨에 치료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나는 맨 앞자리를 예매했을 뿐, 가장 비싼 자리를 얻은 게 아니라는 것을. 단순하게 무대와 가까울수록 좋은 자리라 생각했다. 실제로는 무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하는 뒷자리가 더 비싼 좌석이었다. 아 그럼 그렇지… 괜히 좋아했네.



공연장 안을 가득 메운 관객들





화려한 동물 분장을 한 배우들이 관객석 복도에서 걸어 나오며 공연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이런 무대를 연출했을까? 감탄하려는 찰나 고비가 찾아왔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어를 한참 듣고 있으니 급격히 졸음이 몰려온 것이다. 아직 적응하지 못한 시차도 한몫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에 앉아있는가. 무대 바로 코앞이 아닌가. 내가 조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당신들의 공연이 지루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어제 막 런던에 도착해서 그래요.'라고 변명할 기회조차 없는데. 나는 필사적으로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하품을 참아내는 와중에, 하나씩 새로운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무에 맞춰 움직이는 배우들의 근육, 노랫소리에 떨리는 목청, 그들이 흘리는 땀방울. 이 모든 게 초고화질로 전달되다니. 이건 VIP석에 앉은 관객들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나는 가장 좋은 좌석을 사진 못했지만, 가장 새로운 자리에 앉은 건 확실했다. 여행을 이런 생소한 경험으로 시작하게 되다니.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의 런던에서 나는 또 어떤 생경함을 만나게 될까.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감동을 깨긴 싫지만,

다음에는 굳이 뮤지컬을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역시 나는 뮤지컬 불호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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