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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Nov 09. 2024

런던은 6월에도 패딩을 입는다

차가운 첫인상의 도시


살짝 떨리는 기분으로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지금 내 몸을 울리는 진동은 설렘에서 오는 전율이 아닌 추위에서 오는 오한이었음을. 여행하기 좋은 시기라던 소문과 달리 6월의 런던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마치 영국 사립학교에 다니는 금수저 엘리트 학생 같달까? 이방인에게는 눈곱만큼의 시선도 주지 않는 차가움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아… 망했다…’


작게 내뱉은 한숨이 입김이 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누군가 나에게 하루 전으로 돌아갈 기회를 준다면, 한 치의 고민 없이 옷장에 있는 패딩을 가져오리라. 나는 더 철저한 맥시멀리스트가 되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두꺼운 후드집업, 톳톳한 바지, 아니 최소한 경량패딩이라도 챙겼어야 했다. 내가 런던을 너무 얕잡아봤다.






이 정도 날씨라면, 내가 이고 지고 온 옷들은 아무짝에 쓸모없는 천조각 덩어리로 전락하고 만다. 나름대로는 치밀한 사전조사 후에 고심하여 챙긴 의상들이었다. 뭐,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


런던에 여러 번 가봤다는 사람에게 옷차림을 추천받기도 하고, 런던에 출장 중이라는 지인의 지인을 찾아 최근 날씨도 전해 들었다. 블로그의 최신 여행후기를 매일 검색하며 사진에 찍힌 사람들의 복장을 면밀히 관찰했다.

 

그런데 그 사진이 문제였다. 분명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찍힌 사진인데 사람들의 옷차림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반팔을 누구는 패딩을 입고 있었다. 샤랄라 한 여름 원피스를 입었는데도 땀이 줄줄 났다는 사람도 있고, 으슬으슬한 날씨 때문에 가죽재킷을 걸치고 다녔다는 사람도 있었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걸까. 유난히 더위를 잘 타거나, 추위를 못 견디는 자들의 엄살이라기엔 그 격차가 너무 컸다.


결국 적당히 시원하고 적당히 따뜻한 옷들을 캐리어에 잔뜩 넣었다. 그게 실수였다. 6월의 런던에 ‘적당히’란 없었다.(이 부분은 나중에 더 언급하겠다.) 나를 새까맣게 태울 듯한 화창한 해가 있거나, 오들오들 떨게 만들 비바람이 상시 대기 중이었다. 나는 확실히 따뜻하고 확실히 시원한 옷도 함께 챙겨야 했다. ‘확실히’ 나는 어설픈 맥시멀리스트였다.



공항철도를 타고 숙소로 가는 길. 왼쪽 남자는 패딩을 오른쪽 여자는 코트를 입고 있다.



‘공항이라 바람이 많이 불어서 체감온도가 더 낮게 느껴진 걸 꺼야. 시내로 들어가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희망회로를 돌려봤지만 금방 작동을 멈췄다. 공항철도에 탑승한 현지인들의 옷차림이 영락없는 겨울날씨를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사는 사람들이 패딩과 코트를 입을 정도라면.... 오늘의 런던은 어딜 가든 추운 게 확실하다.


당장 내일 입을 옷이 걱정이었다. 챙겨 온 옷들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조합했다.

후보 1.
이건 좀 덥지 않을까?라고 우려하며 챙긴 청바지

후보 2.
혹시 비가 오면 필요할지도 몰라! 하며 준비한 반 목폴라티

후보 3.
괜히 가져갔다가 짐만 될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여차하면 버리고 올 계획으로 가져온 보풀 가득한 두꺼운 니트 가디건

이걸 왜? 이걸 굳이?라고 생각했던 아이템들이 나의 구원자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허나 나에게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으니. 개그우먼 김숙 님의 유튜브 영상을 보고 영업당해 구입한 ‘여행용 전기장판’이다. 김숙 님은 이 아이템을 추운 나라에 가거나 혹은 겨울에 여행할 때 유용하다고 추천했지만, 나는 런던의 여름을 나기 위해 준비했다. ‘혹시 날이 더워서 써보지도 못하고 짐짝 취급만 받으면 어쩌지’하고 걱정했지만, 천만의 말씀. 결과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소비였다.


비도 오고 쌀쌀한 날에는 잠자리의 온도가 중요하다. 낮 동안 매서운 바람을 맞아 체온이 뚝 떨어졌어도, 뜨끈한 곳에 누워 숙면을 취하면 감기를 가까스로 방어할 수 있다. 나는 얼른 숙소에 들어가서 이 전기매트의 열기를 최대치로 올려 온몸을 지지고 싶었다. 도착 첫날부터 골골대는 건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혹시 몰라서 감기약도 두둑이 챙기긴 했다.)


피카딜리 라인 지하철을 탄지 1시간이 좀 지났을까? 목적지인 킹스크로스 역에 도착했다.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바깥의 서늘한 바람이 다가온다. 역시 런던 중심부로 와도 추운 건 마찬가지구나. 당장 전기장판을 꺼내 온몸에 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싸늘한 첫인상의 런던.

과연 나는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이 도시의 따스한 미소를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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