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허락된 31인치
완벽한 자본주의를 보여주는 장소가 비행기라고 하던가. 철저하게 돈으로 계급이 나뉘는 공간. 우리는 이곳을 현실판 설국열차라고 부른다. 이코노미 티켓을 사는데도 손이 벌벌 떨리는 나 같은 서민에게는 꼬리칸도 감지덕지다. 내돈내산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어른이 된 것에 감사할 뿐이다.
높으신 양반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코노미 안에도 등급이 있다. 꼬리칸이라고 다 같은 좌석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정 금액을 추가로 내면 조금 더 넓은 자리를 얻을 수 있다. 일명 ‘엑스트라 레그룸‘. 이 특별석은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다. 이코노미 계의 퍼스트클래스다.
하지만 나는 서민 중의 서민이 아니던가. 이미 비행기표로 150만 원 남짓한 돈을 지출해 버린 상황. 더 이상의 추가 지출은 허용할 수 없었다. 괜찮아, 난 다리도 짧은데 뭐. 스스로를 이코노미에 특화된 인재라고 토닥였다. 떠난다는 자체가 중요하지 자리가 뭣이 중헌디! (이륙 후 8시간이 지나고 다짐했다. 다음에는 무조건 비상구 앞 좌석을 사수하겠다고.)
띠딩-. 힘차게 비상하던 항공기가 안정권에 진입하자 좌석 표시등이 꺼졌다. 순식간에 창문 밖 풍경이 흰 구름으로 바뀌었다. 설렘마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지금의 기분을 한번 끄적여볼까? 일기를 쓰려고 테이블을 펼치는 순간, 앞 좌석의 등받이가 뒤로 훅 젖혀졌다.
의자에 달린 모니터가 내 얼굴로 돌진하여 접촉사고가 날뻔했다. 아마 내 코가 조금만 높았다면 부딪혔을지도 모른다. 옆 좌석의 기울기와 비교해 보니, 아마 최대치로 의자를 젖힌 것 같았다. 앞자리 아저씨의 정수리가 내 눈에 보일랑 말랑 했다.
보통은 뒷자리 승객이 자고 있거나, 소등된 게 아니면 이렇게까지 등받이를 눕히지 않는데... 더구나 지금은 출발한 지 겨우 30분도 되지 않았다. 앞으로 내가 버텨야 할 13시간 30분을 남겨두고 고민에 빠졌다.
‘조금만 올려달라고 말할까? 주변을 봐. 이렇게까지 등받이를 젖힌 사람은 이 아저씨뿐이야.’ - 버럭이 -
‘근데 의자를 끝까지 젖히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 저 사람은 정당한 권리를 사용한 거지. 올려달라고 말하는 게 무례한 건 아닐까?‘ - 소심이 -
내면에서 분주한 토론이 벌어졌다. 평소의 나였다면 당연히 소심이의 말을 들었을 테지만, 오늘의 나는 다르다. 혼자서 해외도 나가는 용기 있는 젊은이가 아니던가. 이번 여행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티끌만큼이라도 새로운 사람이 되어보고자 떠나는 여정이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용기를 내자!
톡톡.
나는 앞사람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저 죄송하지만, 의자 조금만 세워주실 수 있을까요?"
앞에 앉은 중년남성은 나의 요구에 흠칫 놀란 듯했다. 당황했는지 등받이를 확 세워버렸고, 의자는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완전히 올려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조금 미안했지만 뭔지 모를 뿌듯함이 나를 장악했다. 내가 이런 말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똑 부러지게 자신의 불편함을 드러낼 수 있다니. 거봐, 하면 할 수 있잖아! 스스로가 대견해서 입꼬리가 마구 씰룩거렸다.
그 순간 갑자기 승무원 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마도 기내식을 주려는 모양이다. 출발하자마자 밥을 먹을 줄 알았다면 굳이 말하지 않았을 텐데. (식사를 할 때는 등받이를 세워야 한다.) 소심이가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직 뒤쪽에 앉은 사람들은 음식 구경도 못했는데, 앞쪽 사람들은 벌써 식사를 마치고 커피와 홍차를 마신다. 역시 한국인이다. 식사와 후식까지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과연 비행기만큼 빠른 속도다.
승무원분들이 빈 쟁반을 차례로 수거했다. 최대한 덜 지저분하게 정리한 꽤나 지저분한 트레이를 민망하게 건넸다. 자, 이제 밥도 먹었고 다시 일기를 써볼까? 하려는 찰나, 앞 좌석의 등받이가 찔끔찔끔 뒤로 기울어지더니 곧 완전히 젖혀졌다. 아까 나의 요구사항을 의식한 듯 눈치를 보며 의자를 눕혔다. (사실 그게 더 기분이 나빴다.)
내가 의자를 세워달라는 요청을 한지 불과 몇 십분 밖에 되지 않았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버럭 화가 났다. 이코노미 좌석은 최대 118도(아시아나 기준)까지 기울어진다. 보통 의자 각도가 100도인걸 감안하면 최대 18도의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지금 내 앞에 앉은 아저씨는 18도의 공간을 확보하고자 나의 자리를 침범했다. 겨우 18도를 위해. (욕을 하려던 건 아닌데 유감스럽게 숫자가… 그러하다.)
툭툭.
이번엔 그의 어깨를 거침없이 두드렸다.
"저기, 의자 조금만 세워주시면 안 될까요?"
그런데 그가 적반하장으로 불끈 화를 냈다.
"나도 좁아서 젖힌 거예요!"
그러더니 의자를 살짝씩 올리며 나에게 되묻는다.
"자, 이 정도면 돼요? 더 올려야 돼요?"
순간 다시 소심한 나로 돌아왔다. 연고도 없는 비행기 안, 지금 여기엔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더구나 중간에 내릴 수도 없지 않은가. 얼굴 붉히는 일이 생긴다면 나는 남은 13시간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왜 화를 낸 걸까? 슬며시 앞자리를 살펴보았다. 그제야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미 그의 앞자리 승객이 등받이를 있는 힘껏 젖히고 있었다. 그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나도 똑같이 대응했다면, 내 뒷자리도, 뒷뒷 자리도, 뒷뒷뒷 자리도 기울어졌겠지. 마치 도미노처럼.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죄송스러워졌다. 오랜 시간 다리를 펴지 못하면 불편해서 기어코 복도자리를 사수하던 아빠가 떠올랐다. 내 편안함을 요구한답시고 너무 악착같이 달려든 건 아닌가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분의 옆자리에는 중년 여성이 앉아있었다. 왠지 부부가 함께 여행을 가는 듯 보였다. 나뿐만 아니라 여기에 탄 모든 승객들이 즐거운 일정을 시작하거나 마무리하는 사람일 텐데. 스르륵 마음이 누그러지며 세련되지 못한 나의 대처가 부끄러워졌다.
’나도 훌훌 잊을 테니, 선생님도 마음 쓰지 마세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부탁의 말을 허공에 남겼다. 부디 용기를 가장한 나의 분노가 그분의 여행에 해가 되지 않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