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도 변했다
갑자기. 혼자. 런던에 가보자 다짐했지만, 하나는 포기했다. 첫 번째 로망인 ‘갑자기’였다. 급하게 떠나기엔 제약사항이 많았다. 연말의 직장인에겐 휴가가 없었고, 연초의 회사원은 바빴으며, 겨울의 런던 날씨는 최악이었다.
나는 주로 남들을 피해 휴가를 떠났다. 비수기 여행은 한적하고 비용이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맑은 날이 드물다는 단점이 공존한다. 여행의 8할은 날씨라던데. 매번 5할 정도는 내어주고 여정을 시작했다.
이번 휴가는 달라야 한다. 흐린 하늘은 용납할 수 없다. 우중충 한 것은 내 마음만으로 충분하다. 따스한 햇살과 산뜻한 바람이 무한리필 되는 최적의 시기를 찾아야 한다.
다시 네이버를 켰다. 간단명료하게 ‘런던여행’을 검색했다. 역시나 똑똑한 포털은 내가 원하는 정보를 메인 페이지에 띄운다.
런던여행추천 : 6~9월
악명 높은 런던 날씨가 그나마 자비를 베푸는 시기란다. 그중 제일 빠른 6월로 결정했다. 날짜를 고르고 나니 거의 반년 뒤였다. 불현듯 떠나는 여행은 개뿔. 나는 다시 완전한 계획형 인간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동안 여행을 잊고 지내던 날들이 쌓여갔다.
어느덧, 출국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떠나기 전,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 여권 갱신이었다. 출국은 24년 6월. 내 여권의 유효기간은 한 달 뒤인 24년 7월이었다.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는 출발일을 기준으로 최소 6개월의 여유기간이 필요했다.
유효한 여권도 없이 어떻게 비행기표를 샀을까? 다행히 항공권을 예매할 때는 여권번호를 적지 않아도 된다. 이름 외에 나머지 정보는 수정이 가능하다. (이름은 수정이 되지 않는다. 스펠링을 꼭 확인하자.)
항공사의 너그러움에 나의 귀차니즘은 방심했고, 결국 여행 직전에 여권을 갱신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젠 정말 시간이 얼마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재발급을 미루고 있었다.
취직한 해에 여권을 만들었다. 첫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 부랴부랴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사용기간은 넉넉하게 10년으로 선택했다. 만료일에 적힌 2024년이라는 숫자가 밤하늘의 별처럼 멀게 느껴졌다.
헌데 그날이 정면으로 다가왔다. 평생을 쓰고도 남을 것 같던 10년짜리 여권이 수명을 다하다니. 까마득했던 2024년은 달력에 박혀 현실이 되었다. 이는 곧, 내가 일을 시작한 지 10년이 지났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10년 앞에 겨우, 고작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 강산이 변하는 시간의 위엄은 생각보다 위대하니 말이다. 그간 많은 것이 변했다. 법률상 나이 앞자리가 3으로 바뀌었고, 신체 나이도 변하면서 잔병이 늘어났다. 결정적으로, 내 얼굴에 10년의 시간이 입혀졌다.
푹 패인 눈두덩이와 볼살, 두드러진 팔자 주름과 광대, 묘하게 길어진 중안부, 미세하게 보이는 눈가의 잔주름.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다. 시간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자만한 안일한 마음을 비웃기라도 한 걸까. 세월이 보란 듯이 나를 향해 돌진한 듯했다. 개기름은 흐르지만 생기는 없는 얼굴. 꼴 보기 싫었다. 깨끗하게 닦여진 적나라한 거울을 마주칠까 두려웠다.
그런데 이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야 한다니. 그걸 또 여권에 넣어야 한다니. 앞으로 10년이나 두고두고 이 몰골을 봐야 한다니. 공항에 갈 때마다 이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니. 지금을 박제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요즘 같은 성수기에는 2주 넘게 소요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금 당장 진행해야 안전한 도망이 가능했다. 어쩔 수 없다. 흑역사를 남기는 수밖에.
요즘은 집에서 셀프로 여권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있다. 비용은 들지 않지만 규격에 맞지 않아 반려될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이 부족한 나에게는 맞지 않는 선택이다. 더구나 지금 내 얼굴은 전문가의 보정이 꼭 필요하지 않은가. 동네 사진관 중 여권 사진을 찍어주는 곳을 찾아갔다.
사진관 안에는 대형 가족사진이 많이 걸려있었다. 중년의 사진사 아저씨가 혹시 실력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분이라면 마음에 안 드는 얼굴도 바꿔줄 수 있으려나. 살짝 기대했다.
사진사 아저씨는 한쪽에 마련된 거울과 빗을 가리키며 머리 정돈이 끝나면 말해달라고 하셨다. 손질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나는 곧바로 카메라 앞에 앉았다.
“왼쪽 어깨만 살짝 내려보세요.“
“고개는 살짝 숙이고요.“
“미소를 살짝만 지어볼까요? 좋아요, 그대로 계세요.”
간단해 보이지만 어려운 주문이 계속되었다. 세 번의 후레시가 터지고 촬영은 끝이 났다.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 찰나. 이리 와서 원하는 사진을 골라보라고 하신다. 사실 내가 고민하기도 전에 가장 괜찮은 한 장을 제안하셨다. 내가 보기에도 그게 가장 나아 보였다.
마우스 포인터가 내 얼굴 위를 휙휙 지나간다. 순식간에 보정이 끝났다. 얼굴로 본인 확인을 하는 여권 사진의 특성상 과한 포토샵은 금물이다.
혹시 추가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냐고 물어보신다. 유독 짝눈이 거슬렸다. 눈꺼풀에 생긴 주름이 유발한 비대칭이다. 사진사 아저씨는 단숨에 크기를 맞추고는 곧바로 반질거리는 사진을 뽑아주셨다. 사진 속 내 모습이 여전히 별로다.
10년이 지나니 여권도 많이 변했다. 일단 표지가 진한 녹색에서 쨍한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 신청도 가능하도록 개선되었다. 사진 규격도 완화되어 양쪽 귀를 드러내는 수치심은 느끼지 않아도 된다.(단, 눈썹은 보여야 한다)
여권은 이렇게나 좋아졌는데,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우울감에 새 여권을 받고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업무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스트레스에 망가지지 않았다면… 몸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다면… 나는 만족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나아진 점이 있었다.
10년 전의 나는,
혼자 해외로 떠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10년 전의 나는,
소심해서 긴 휴가를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10년 전의 나는,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할 마음도 먹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표면의 싱그러움은 사라졌다. 하지만 탄탄한 피부가 느슨해진 만큼, 마음은 한결 단단해진 게 분명했다. 새로워진 여권처럼 나도 나아지고 있었다. 좋은 방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