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혼여행의 시작
끄응-. 묵직한 캐리어를 끌고 집 밖을 나섰다. 잠깐 들었을 뿐인데 전완근이 팽팽해졌다. 역시나 대중교통 이용은 무리겠군. 택시를 타고 공항 리무진 정류장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출발 시간보다 20분 빨리 도착했다. 적당한 여유로움이었다. 친절한 기사님이 운전석에서 내려 트렁크 속 가방을 바닥으로 옮겨주신다. 여행의 시작부터 따스한 분을 만나다니. 왠지 예감이 좋다.
잠시 뒤, 시간을 칼같이 맞춘 공항버스가 왔다. 짐칸에 캐리어를 넣고 가벼운 몸으로 자리에 앉았다. 인천공항까지 소요 시간은 대략 1시간. 한숨 자기에 딱 좋은 여정이다. 의자에 기대 눈을 감는다. 푹신한 가죽, 120도까지 젖혀지는 등받이, 기사님의 부드러운 운전. 숙면을 취하기 최적의 조건이 넘쳐나는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냥 창 밖을 구경하며 가기로 한다.
"인천공항 1 터미널로 가시는 분들은 내리세요."
도착하자마자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느긋하게 산책만 하던 심장이 갑자기 경보를 시작한 느낌이었다.
떨리는 마음을 태연하게 숨기고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곧장 항공사 카운터로 직행이다. 가장 먼저 이틀 전 모바일 체크인을 마친 티켓을 발권했다. 이제 짐만 부치면 미션 클리어. 마침 카운터 앞에 셀프 수화물 기계가 있다. 요즘엔 별게 다 셀프다. 모든 걸 혼자서 해야 하는 이번 여행의 모습과 닮았다.
항공사에서 허용한 수화물의 무게는 23kg. 이를 넘기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한다. 언제나 내 가방은 기준치에 한참 못 미치는 무게였다. 가까운 곳을 가든, 먼 곳을 가든, 짧게 다녀오든, 오래 다녀오든. 항상 그랬다. 많이 나와봤자 10kg 정도? 그런데 이번에는 팔에서 느껴지는 중량이 남다르다. 아니나 다를까, 저울의 숫자가 15kg를 가리킨다.
미니멀리스트에 가까운 내 성향은 해외여행을 갈 때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괜히 가져왔다며 후회하는 경우보다, 챙기지 않아서 아쉬워하는 때가 많다. 그런데 혼자 가는 여행이라는 특수성은 나를 맥시멀리스트로 만들었다. ‘혹시 몰라 병’에 걸려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캐리어가 가득 찼다. 빼곡하진 않지만 빈 공간은 없는 상태. 아무래도 내 불안감이 채워졌다보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점점 멀어지는 캐리어를 바라본다. 무사히 런던에서 만나길 기도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저것뿐이다.
짐도 보냈고, 환전한 돈도 찾았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사실 지금까지는 혼자 해도 어색함이 없는 것들이다. 여행메이트가 있어도 공항에는 항상 혼자 왔었고, 친구나 가족을 기다리며 홀로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시간은 익숙했다.
원래는 이쯤 되면 누군가가 나타나야 한다. 함께 출국장에 줄을 서서 면세점 구경은 언제 할지, 밥은 뭘 먹을 건지 결정하곤 했다. 그런데 동행자가 보이지 않는다. 새삼 실감이 났다. 내가 정말 혼자 해외를 가는구나. 이 공항에, 곧 타게 될 비행기에, 머지않아 도착할 낯선 도시에 나를 아는 사람이 없다. 내가 아는 사람도 없다. 철저히 혼자만의 시공간에 들어섰다.
개인적으로 연예프로그램 중 <하트시그널>을 참 좋아했다. 그 방송에서는 남녀의 행동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해 주는데, 그중 하나가 '흔들 다리 효과'였다. 긴장된 상황에서 이성에게 더 호감을 느낀다는 이론이다. 주변 상황에서 느끼는 흥분과 상대에 대한 호감을 구분하지 못해 생겨난 현상이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 나는 흔들 다리 위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느끼는 심장의 떨림이 혼자 남겨진 긴장감인지 혹은 여행의 설렘인지 헷갈렸다. 긴장이 설렘이 되기도 하고, 설렘이 긴장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초조한 마음이 전부였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살짝 경직된 기분마저 새롭고 즐겁게 느껴졌다.
나는 새로운 여행지만 기대되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들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