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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Oct 26. 2024

런던으로 도망갑니다

도망과 로망 사이


2023년 12월, 어느 주말이었다. 나는 거실 한쪽에 드러누워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져 축 쳐진 모습. 미동도 없고 영혼도 없었다. 몸통은 천장을, 고개는 벽면의 TV를 향했다. 뭘 보고 있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머릿속에는 딴생각이 드글거렸다.


’떠나야겠다‘


아까부터 이 생각뿐이었다. 아니, 사실 오래전부터 품어온 열망이었다. 사라지고 싶다는 욕구. 그 발화점을 찾으려면 아주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나는 때때로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또 가끔은 그 자취마저도 햇빛에 묻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짠내가 풀풀 풍기는 소망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도돌이표 같은 일상이 지겨워서, 회사에 출근하기 싫어서, 꼴 보기 싫은 얼굴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어떤 경로를 이탈하고 싶은 걸까. 다 맞는 것 같기도, 다 틀린 것 같기도 했다. 올해의 나는 유독 지친 상태였다.


이유는 흐릿하지만 목적은 분명한 행동들이 있다. 이번 여행이 그랬다. 왜 가야 하지? 정확한 연유는커녕 핑곗거리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의도는 뚜렷했다.


도망.

이번 여행의 테마는 해외 도피다.






텔레비전에 쏠린 고개를 끌어당겨 핸드폰에 고정시켰다. 곧바로 네이버를 켰다. 검색창에 ‘항’이라는 글자만 입력했을 뿐인데 ‘항공권예매’가 자동완성된다. 너 이거 찾고 있지? 그냥 따라와! 나는 자연스레 포털사이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도주를 계획했다.


항공편을 조회하기 위해선 3가지 항목이 필요했다.

가는 날, 오는 날(날짜)

도착지(목적지)

인원수(동행인)

뭐 하나 채울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연했다. 불현듯 달아나는 도망에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






그때였다. 내 무의식에서 은둔생활을 자처하던 로망들이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는 좀처럼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는 친구들이었다. 그중 한 로망친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갑자기 떠나는 여행을 해보고 싶었어"


나는 갑자기 나타난 ‘갑자기’라는 부사에 귀가 번쩍 뜨였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 숨어 지내서 (나라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듯했다. 나는 완전한 계획형 인간이다. 심지어 계획하는 일을 계획하기도 한다. 이런 기질은 특히 여행에서 심하기 발휘된다. 그런데 곧이어 다른 친구가 말을 이어간다.



"나는... 혼자 해외여행 가보는 게 버킷리스트야"


혼밥과 혼술에 능숙하고, 혼자서 잘 돌아다니지만, 외국은 얘기가 달랐다. 문제는 하찮은 영어 실력이다. 그간 해외로 자유여행을 떠난 건 동행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집단지성으로 겨우 언어의 장벽을 넘어왔는데, 나 혼자라니. 제 아무리 번역기가 신통방통 하다 해도 아직은 무리였다. 그때 마지막 로망친구가 손을 번쩍 든다.



"나는… 런던에 가보고 싶어!"


런… 던? 툭 하고 튀어나온 도시명에 정적이 흘렀다. 순간 모든 로망친구들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무형의 도파민이 샘솟았다. 이번엔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못 이기는 척 들어주고 싶기도 했다. 아직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상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니. 이 로망은 꼭 실현해야 한다.






하지만 잠시 폭발한 엔도르핀으로 고가의 비행기표를 구입할 순 없다. 나는 다시 원래의 소심한 인간으로 돌아왔다.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냉철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혼자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판단할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참고하기로 했다. 다시 네이버를 켰다. 이번 검색어는 ‘여자혼자 해외여행’. 생각보다 많은 후기가 쏟아졌다. 세상에는 용기 있는 멋진 사람들이 많구나. 수많은 기록들을 보고 나니 약간의 패기가 생겼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하던가. 어영부영하다가 일주일이 흘렀다. 나는 어김없이 바닥과 평행이 된 채로 누워있었다. 지난 주말과 동일한 장면이었다.


저번과 동일한 조건으로 항공권을 조회했다. 같은 날짜, 같은 목적지, 같은 항공사. 하지만 다른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가격이었다. 금액이 무려 10만 원이나 올라있었다. 오늘이 제일 싸다는 말은 도망에도 적용되는 말이던가.


일주일 사이에 급등한 가격을 보고 로망부대가 소리쳤다. 그러게 저번주에 바로 샀으면 좋았잖아! 내 마음이 요청했던 준비시간을 더 이상 줄 수 없었다. 당장 결제를 진행했다. 우려하던 걱정들이 단돈 몇 만 원에 속전속결로 해결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했지만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여전히 갈팡질팡하다가 흐지부지 되었을지 모른다.


카드사에서 승인 문자가 날아왔다. 동시에 확정된 항공권이 메일로 도착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 가보자.

나 혼자, 런던으로.



남들에겐 퇴사짤, 나에게는 겨우 휴가짤


10만원이 오른 것을 보고 바로 구입한 항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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