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러려고 여기에 왔나
14시간을 날아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나는 아직 런던에 도달하지 않았다. 이곳은 행정구역 상 런던에 속해 있는 공항일 뿐. 인천국제공항을 통째로 파파고에 넣어 한글을 영어로 번역한 모습에 낯섦과 익숙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아직은 설렘과 거리가 멀다.
시내로 나가기 위해 '피카딜리 라인' 노선을 이용했다. 가장 오래 걸리고, 가장 저렴하지만, 창 밖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바깥 풍경이 생소하긴 하지만 아직도 설렘은 아니다. 생각보다 무던한 심장에 당황스러웠지만 괜찮다. 아직 나는 진짜 런던을 보기 전이다.
중심부에 가까워지니 지상철이 지하철로 변했다. 창문은 암흑으로 물들었고, 듣던 대로 핸드폰은 터지지 않았다. 이번 역은 어디지? 몇 정거장이나 남았지? 올바른 하차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지금 난 혼자니까.
마침내 숙소가 있는 킹스크로스 역에 도착했다. 에스컬레이터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런던의 지상으로 나아간다. 15kg이 넘는 역대급 캐리어를 거침없이 끌며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도합 15시간 만에 나의 첫 런던을 만났다.
알에서 나온 새끼 새가 눈앞에 보이는 새를 어미로 인식하 듯, 나는 지금의 첫 광경을 기꺼이 런던으로 받아들인다. 역 앞 광장에는 나처럼 짐을 든 여행객들이 몇몇 있었고, 그 뒤로는 익숙한 프랜차이즈 음식점을 품은 이국적인 건물들이 보였다. 그때, 빨간색 이층 버스가 유유히 지나간다. 덕분에 로딩 중이던 머리가 현실을 자각했다. 내가 진짜 런던에 왔구나.
킹스크로스(King’s cross) 역은 여러 지하철 라인을 이용할 수 있고, 유로스타를 탈 수 있는 세인트 팬크러스(St. Pancras) 역과 인접해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역이나 용산역 즈음 되는 아주 큰 역이다.(그래서인지 노숙자도 있었다.) 평소 서울역 앞에서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젠 내가 그들이 되었다. 별 의미 없는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앞에 앉은 남자가 나를 멀뚱하게 쳐다본다. 내가 서울역에서 지은 표정이 저랬을까?
아쉽게도 들뜨는 감정은 잠시였다. 매서운 바람은 내 텐션을 빠르게 가라앉혔다. 찬 물, 아니 찬 바람을 끼얹은 듯했다. 연신 셔터를 누르던 손가락이 굳기 시작했다. 한기를 막아줄 아늑한 숙소가 시급했다. 나에게는 무려 7일의 런던이 남아있지 않은가. 바깥 구경은 찬찬히 하기로 하자.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낭만을 즐기기엔, 나는 너무 춥고 배가 고팠다.
런던에 오기 전, 가장 고심한 것이 숙소였다. 나는 여행의 여러 요소 중 숙소에는 관대한 사람이라 생각했으나, 이번 경험으로 스스로를 수년간 오해했음을 알게 되었다. 적당한 위치, 적당한 청결, 적당한 금액.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키는 숙소를 찾기는 만만치 않았다. 런던은 미친 물가를 자랑하는 도시 중 하나고, 유럽에는 특히나 오래된 건물이 많다. 더불어 내게는 몇 가지 추가 조건까지 있었다. 혼자이기에 생겨난 특약사항들이다.
일단 치안이 좋은 동네에 위치해야 한다. 밤에도 혼자 숙소를 들락날락할 수 있을 정도? 큰 길가에 위치하거나 적어도 으슥한 골목은 아니어야 했다. 또, 혼자 사용하는 독립된 방이 필요했다. 여럿이 한 방에 묵는 도미토리 룸은 아무리 저렴해도 배제했다.
내 집장만 하는 것보다 까탈스럽게 한인민박집 하나를 찾아냈다. 이곳에는 단독 객실이 있어 혼자만의 공간이 보장되었고, 민박집 답지 않게 화장실이 무려 3개나 있어 눈치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호텔처럼 매일 수건을 교체해주진 않지만 그보다 저렴한 가격이 충분이 메리트 있었다. 허나 나의 마음을 흔든 건 따로 있었다.
특이사항: 한국인 스탭 있음
내가 호텔이 아닌 한인민박을 선택한 이유. 바로 이것 때문이다. 마음 한구석을 의지할 수 있는 낯선 동포를 곁에 두었다는 심리적 안정감. 혹시나, 만에 하나, 정말 재수 없게 생길지 모르는 만일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연락할 한국사람이 있다는 것. 혼자 해외여행이 처음인 나에게 꼭 필요한 옵션이었다.
“저 도착했습니다!”
역 근처 서브웨이에서 직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10분도 되지 않아 한 남자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아마도 저 사람인가 보다. 내가 일주일간 남몰래 의지하게 될 동포님.
만남 장소에서 코너만 돌았는데 바로 숙소 건물이 나왔다. 유럽의 가정집답게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다. 직원은 꼬질한 키링이 달린 열쇠를 건네주며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며 신신당부를 한다. 곧이어 분실하면 50파운드(약 8~9만 원)의 비용이 발생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그 열쇠만큼은 꼭 지키겠노라 다짐했다.
입구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 전 리모델링을 했다는 주인장의 말처럼 하얀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깨끗하지 않았다는 게 놀라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리모델링은 호박이 수박이 되는 수준의 환골탈태인데, 이곳에서는 아마 호박이 단호박으로 변하는 정도를 의미하는 듯했다. 예전의 낡은 모습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주방과 화장실 위치를 안내받고, 드디어 내가 지낼 방 문 앞에 다다랐다. 끼익-. 나무로 된 문이 삐그덕 열렸다. 숙소 소개를 마친 직원은 짐을 방 안으로 들여놔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가 나간 뒤, 방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내 표정은 점점 굳어졌다.
분명 내가 봤던 사진과 닮았는데 달랐다. 2인실이라고 했지만 1인이 쓰기에도 빠듯한 공간, 뭉쳐진 지 오래된 듯한 머리카락 뭉치,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침대 밑에 놓인 슬리퍼 한 짝, 코 한번 풀고 나면 끝나버릴 앙상한 두루마리 휴지.
이 상황, 어딘가 익숙했다. 예전에 소개팅을 나갔다가 사진과 다른 상대의 모습에 순식간에 실망해서, 밥을 먹는 내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한 적이 있다. 애석하게도 나는 이 숙소와의 소개팅에 실패했다. 갑자기 여행이고 뭐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예상과 다르게 추운 날씨, 예상보다 별로였던 숙소, 예상치 못하게 시작된 대자연으로 생리통약을 영양제처럼 먹어야 하는 몸상태. 모든 게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설렘이란 감정의 멱살을 잡아끌고 오려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런던 1일 차. 내 마음은 우울감으로 점령당했다. 심드렁한 심정을 나눠가질 사람도, 서로를 보며 위안을 삼을 존재도 없다. 이 기분마저도 오롯이 혼자 감내해야 한다.
큰일이다. 갑자기 런던 여행이 하기 싫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