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1 존 벗어나기
“축구 보러 가요?”
행선지를 밝히자 의외의 질문이 따라왔다. 바로 축구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때까지 몰랐다. 영국이 이토록 축구에 진심인 나라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나라 2030 남성들이 해외 축구를 보느라 밤잠을 설친다는 사실도. 이들은 런던에 간 김에 축구를 보는 게 아니라, 축구를 보러 런던에 가려는 사람들이었다.
간헐적이지만 지속적인 축구팬들의 물음. 그럴 계획이 없다는 내 대답을 들을 때마다 그들의 미간은 하나 같이 일그러졌다. 마치 내가 엄청나게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거나 다름없다는 표정. 타인의 반응에 쉽게 움직이는 내 귀가 펄럭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선수가, 그것도 프리미어 리그 주장으로 뛰는 경기를, 두 눈으로 직관할 기회가 또 올까? 이건 축구에 대한 애정과는 별개로 꼭 체험해야 하는 경험일지 몰라!
하지만 내가 여행을 가는 때는 6월. EPL(England Premire League) 시즌이 끝난 이후다.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여행 날짜를 바꾸지 않는 이상 축구경기는 볼 수 없으니까. 단숨에 고민거리가 사라져서 후련해졌지만, 왠지 모를 아쉬움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대로는 뭔가 허전한데... 경기는 못 보고, 손흥민 선수는 못 만나지만, 그가 머물던 런던을 영접하자!
나는 손흥민 선수가 지내는 동네를 찾아가기로 했다.
손흥민 선수는 햄스테드(Hampstead)라는 런던 북부 지역에 살고 있다. 그곳의 고급 아파트에 거주 중인데, 우리가 잘 아는 주 드로, 다니엘 크레이그와 이웃사촌이란다. 눈치챘겠지만 여기는 런던에서 소문난 부촌이다. (실제로 생전 처음 보는 슈퍼카들이 거리에 널려있었다.)
런던은 ’존(Zone)’으로 구역이 나뉜다. 런던의 가장 가운데는 1존, 그다음은 2존, 맨 가장자리는 6존이다. 계란프라이의 노른자 부분을 1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흔히 비싼 지역을 ‘노른자 땅’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런던 역시 1존이 가장 번화한 곳이다.
웬만한 관광지 역시 1존에 몰려있다. 그러니 대다수 여행객들은 런던의 한가운데에만 맛보고 돌아가는 셈이다. 그건 노른자만 콕 집어먹고 ‘아 계란은 이런 맛이구나’ 하는 것과 같다. 흰자의 탱글함과 깔끔한 맛은 전혀 모른 채. 물론 핵심은 노른자라는 걸 부정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체를 대변하진 못한다.
내가 맛본 결과, 진짜 런던은 1존 밖에 있었다.
햄스테드는 런던 2존에 위치해 있다. 1존 중심부에서 지하철로 30분 정도면 도착한다. 생각보다 멀지 않아서 기분전환 하기에 좋다. 시끌벅적한 노른자를 벗어나니 느껴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순간 내가 다른 도시에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게 진짜 런던의 모습이려나. 3존, 4존으로 나아가면 얼마나 새로운 런던이 기다리고 있을까.
쌩하고 찬바람이 불던 1존 공기와는 달리, 이곳은 산들바람이 분다. 길에서 마주친 이웃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근황을 묻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가 젤라또를 먹으며 즐거워한다. 알록달록한 목줄을 이끄는 커다란 반려견이 꼬리를 흔든다. 이건 영화에서도 본 적 없는 모습이잖아! 나는 잠시 현실감각을 잃어버렸다.
이곳이 부촌임을 확신한 건 정체 모를 슈퍼카 때문이 아니다. 과하지 않지만 깔끔한 옷차림. 합석해도 되겠냐며 정중하게 묻는 말투. 매너는 몸에, 미소는 얼굴에 배어있었다. 지금 나를 제외한 모두가 웃고 있다. 혹시 동네에 엄청난 호재가 생겨서 집값이 왕창 오르기라도 한 걸까. 어쩜 이렇게 다 같이 행복해 보일 수가 있지?
일단 본격적인 손흥민 투어를 해보자. 먼저 그의 단골 빵집부터 가기로 했다. 다큐멘터리 영상에서도 나온 Boulangerie bon matin이라는 카페다.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자주 들르는 곳이라고 한다. 나는 그곳에서 따뜻한 홍차와 초코 치즈케이크를 주문했다. 당연히 케이크는 손흥민 선수가 사 먹은 것과 같은 것으로.
조그마하고 납작한 케이크 한 조각에 만원. 이건 단순한 디저트가 아니라 투어비용이야!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오호? 내가 먹었던 치즈케이크 중에 손에 꼽는 맛이었다. 그러니까 손흥민 선수가 이걸로 피곤을 푼다는 거지? 보상심리로 달다구리를 먹는 건 월드클래스도 똑같구나.
이번엔 그가 갔을법한 동네의 공원을 가기로 했다. 햄스테드 히스(Hampstead Heath)라는 아주 거대한 숲이다. 평소 조깅으로 훈련하는 그가 이곳에 오지 않았을 리 없다. 나는 그가 뛰었을 숲길을 따라 걸었다.
명칭이 적힌 이정표를 지나니 바로 숲이 시작되었다. 어디부터가 공원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활한 공간. 사람은커녕 나무와 들풀만 가득했다. 자연과 나만 존재하는 기분. 마치 무인도에 들어온 듯한 느낌. 화창한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조금 무서워졌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이제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암밴드를 차고 조깅하는 사람, 강아지와 함께 산책 나온 보호자, 부부 혹은 부모님과 함께하는 가족들. 오늘의 햇살을 얼굴에 심은 듯 다들 표정이 환하다. 아까 거리에서 봤던 사람들과 똑같은 미소. 이곳 주민들, 다 같이 로또를 맞은 게 틀림없다.
이런 숲을 뒷마당 삼아 살면 어떤 기분일까. 공원에 진심인 이 도시에서, 감히 런던의 허파라고 칭할 정도로 거대한 공원을 보며 생각했다. 어쩜 이것이 가장 런던다운 모습일 거라고.
손흥민 선수가 살지 않았다면 절대 와보지 않았을 곳. 나는 처음으로 일주일의 시간이 짧게 느껴졌다. 하루만 더 있었다면 여기에 다시 올 텐데. 조금만 시간이 있었다면… 내가 왜 이제야 여기에 왔을까 하는 후회. 지금이라도 와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다시 이 동네에 와봐야겠다.
혹시 내가 다시 런던에 오게 된다면,
그때는 런던 끝까지 뻗어나가 보자.
그곳에 또 다른 진짜 런던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