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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Jan 01. 2025

내 눈에 뭔가 씐 것 같아요

런던 콩깍지


“야, 런던 남자들 되게 잘 생겼어“


홀로 떠나는 외국여행이 긴장된다던 내 칭얼거림이 마음에 남았던 걸까. 내가 입국수속을 마친 순간부터 지금까지 친구는 매일 안부를 물어왔다. 일명 생사확인용 메시지. 나는 그간 찍어둔 사진 중 괜찮은 것을 몇 장 골라 보내며 답변을 대신했다. 내 신상에는 문제가 없으니 안심하라는 뜻이다. 여행 온 사람이라기엔 한참 낮은 텐션. 친구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나 보다.


오늘도 어김없이 연락이 왔다. 여행이 후반부로 향하는 길목에 들어선 날이었다. 지금은 뭘 하고 있냐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뜸 런던 남성들의 외모 찬양을 시작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기막힌 동문서답을 친구는 우문현답으로 받아들였다. 이제야 내가 여행에 적응했음을, 즐기기 시작했음을, 어쩌면 친구는 나보다 먼저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나에 관해 눈치가 밝은 친구를 뒀다는 건 정말이지 감사한 일이다.


‘날씨가 너무 추워’, ‘조금 심심해’, ‘출근보단 낫지 뭐’. 이게 휴가 간 사람인지, 출장 간 사람인지. 요 며칠 미적지근한 반응만 보이던 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영국 남자가 잘생겼다고? 근본 없는 전개 속에서 내 들뜬 입꼬리가 보이기라도 한 걸까. 친구는 이제야 평소 말투를 드러내며 대화를 이어갔다. 살짝 시크하면서 위트 있는 그녀만의 어조로.


“너, 콩깍지 제대로 씐 듯“






많은 나라를 가본 건 아니지만, 런던만큼 멋진 사람이 넘치는 곳은 없었다. ‘미남이 많은 나라’ 세계 2위인 이탈리아에 갔을 때도, 멋쟁이 파리지앵을 기대했던 프랑스에서도. 동공이 흔들릴만한 현지인을 마주하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런던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날 줄이야. 영국은 ‘신사의 나라’라고 하던데. 매너가 얼굴에도 베여있는 건가.


그런데 이게 콩깍지라니!


나는 런던 남성들의 대변인이라도 된 듯 억울해했다. 이 광경을 직접 봤다면 콩깍지라는 진단을 내리진 못했을 거야. 얼굴은 살짝 ‘휴 그랜트’ 리즈시절 느낌? 양복 입은 모습은 킹스맨 그 자체라니까! 이렇게 말해도 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겠지. 내 눈은 끝내 친구의 의심을 벗어나지 못했다.


휴 그랜트와 킹스맨이라니.

그때 눈에 뭐가 씌었던 것 같기도 하다.


리즈시절이라 불리는 <노팅힐>의 휴 그랜트





내가 휴 그랜트와 킹스맨을 본 건 런던에 입성한 지 6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런던의 참모습이 궁금해졌다. 빅벤의 웅장함에 감동받는 시기는 지났고, 타워브리지를 봐도 사진 따위는 찍지 않았다. 무엇보다 단체 여행객이 득실거리는 장소는 정말이지 신물이 났다. ‘런던 겉핥기’는 그만할 때가 되었구나. 나는 관광객 딱지를 떼고 어엿한 여행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큰 도로변으로만 걷던 발걸음을 골목 사이사이로 옮겼다. 한 블록만 이동했을 뿐인데 풍경과 소리가 달라진다. 여행가방을 멘 사람들이 아닌, 서류가방을 든 회사원들이 나를 스쳐간다. 런던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모습이구나. 여기서 일하는 직장인들은 이런 표정이구나. 이제야 비로소 낯가림을 끝내고 런던의 본모습을 마주했다.


햄프스티드(Hampstead)로 향하던 중에 잠시 소호(soho)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전 세계 어디든 소호지역은 사람이 넘쳐흐른다. 정신줄과 가방끈을 부여잡고 빠르게 걷는 그 순간, 나는 비밀스러운 입구 앞에서 멈춰 섰다. 스트리트 푸드 마켓? 여기 이런 게 다 있네. 월요일부터 목요일 점심시간에만 열리는 시장이라고? 언제 다시 소호에 올지 모르는데, 그럼 가야지! 나는 마치 이곳에 오려고 바삐 움직였던 사람처럼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나를 멈춰세운 입간판





세인트 제임스 성당 앞에 있는 사우스우드 정원에서 열리는 작은 마켓.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은 넷플릭스 시리즈 <브리저튼 2>의 촬영지였다.) 간이 천막에서 다양한 음식들이 기막힌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비록 영국 음식은 아니고, 케밥이나 빠에야 같은 외국 먹거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오히려 좋아! 음식맛에 실망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현지 시간으로 오후 12시 반. 회사 점심시간과 겹쳐서인지 주변은 온통 직장인들이었다. 세미정장을 입은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직장인들. 나는 잠시 런던에서 근무하는 회사원이 된 듯 여행자라는 신분을 망각했다. 백조 사이에 홀로 존재하는 오리가 스스로를 백조라고 착각하듯이.


혼자이기에 선택할 수 있는 메뉴는 단 하나.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이럴 때는 방법이 있다. 사람들이 고르는 음식을 먹으면 된다. ‘기사님과 직장인이 추천하는 식당은 중박 이상’이라는 진리는 만국 공통이니 말이다. 가만있어보자… 어디가 제일 사람이 많지? 양복부대가 가장 길게 줄을 서 있는 가게 앞으로 나도 따라 섰다.


점심을 기다리는 런던 사람들





이 가게는 ‘괴즐레메’라는 튀르기예 음식을 팔고 있었다. 괴즐레메는 넓게 펼친 밀가루 반죽에 각종 토핑을 넣어 만든 터키식 부침개다. 반달 모양으로 접어 익혀주는데, 흔히 알고 있는 퀘사디아와 비슷하다. 안에 들어가는 재료가 다양하여 잠시 당황했지만, 이럴 때도 다 방법이 있다. 무조건 맨 위에 적힌 메뉴를 주문하면 된다. 시그니처 음식을 상단에 적는 것도 만국 공통이니까.


잠시 기다리니 주문한 괴즐레메가 나왔다. 주인은 눈짓으로 나를 불렀고, 나는 재깍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Have a nice day!”라고 말하며 묵직한 음식상자를 건넨다. 런던 여행을 하며 처음 들은 따스한 말. 나도 모르게 기쁨을 동반한 울컥한 감정이 올라왔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형식적인 인사말. 그 안에 진심이 얼마만큼 들었는지는 상관없었다. 허울뿐인 말이라 해도 괜찮다고 생각할 정도로 목말랐던 따스함이었으니까.


각종 채소와 체다치즈가 버무려진 괴즐레메를 들고 천막 뒤편으로 향했다. 제대로 된 의자도 테이블도 없이 잔디만 깔려있는 아담한 정원. 어디에 자리를 잡고 먹어야 되지? 고민했지만 이미 정답은 나와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길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기 때문. 이번에도 역시 양복부대를 따라 앉았다.


길에 앉아 먹은 괴즐레메





길에 앉아 먹으니까 ‘스트리트 푸드‘인가? 나야 여행자니까 상관없다. 런던 길바닥에서 먹는 것도 다 낭만이라고 무한긍정회로를 돌리며 한 끼 해결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저들은 도대체 왜? 잘 다려진 정장바지에 깃이 잔뜩 세워진 셔츠를 입고 길에 앉아 밥을 먹다니. 더 이해되지 않는 건 나였다. 저 그림을 보고 왜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데?


정원에 서식하는 비둘기들이 사람들을 향해 뒤뚱뒤뚱 걸어온다.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이어간다. 여기서 얼마나 풍족하게 먹고 산 건지 몸집이 장난 아니게 육중하다. 조류공포증이 있는 나는 차마 그 녀석들까지는 낭만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새들이 무섭다거나 혐오스럽다거나 더러울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런던 콩깍지가 씌워졌나 보다.

언제까지 벗겨지지 않고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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