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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dermovie Feb 21. 2022

예술에 대한 사랑스러우면서도 비극적인 이야기

시라노 (Cyrano, 2021)

시라노 (Cyrano, 2021)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에서부터 시작된 시라노와 록산느, 그리고 크리스티앙의 사랑 이야기는 10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매체를 통해 재생산되어왔다. 조 라이트 감독의 <시라노>는 뮤지컬로 제작되었던 로스탕의 희곡을 다시금 뮤지컬 장르의 영화로 스크린에 옮긴 결과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라이트의 시라노는 꽤나 눈이 즐거워지는 작품이다. 영화를 내내 채우는 뮤지컬 넘버들은 하나같이 훌륭하며 시라노(피터 딘클리지)는 카리스마와 기품이 느껴지고, 록산느(헤일리 베넷)는 우아하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크리스티앙(켈빈 해리슨 주니어)은 안타까우면서도 매력적이다. 이렇듯 <시라노>는 각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 워킹 타이틀스러운 또 하나의 사랑 영화로 존재한다.


<시라노>는 이러한 사랑 이야기에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결합시킨다. 사실상 극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는 이 영화는 그 극장 시퀀스에서 이 영화가 예술에 관한 영화임을 선언하고 있는 듯하다. 사랑과 예술을 같은 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비극을 맞으면서 끝이 나는 러브스토리를 통해 실패한 예술과 그 실패 이유에 대해서 말하며 예술이, 혹은 예술가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역시 주목해야 할 것은 초반부의 극장에서 벌어지는 시퀀스다. 이 극장 시퀀스는 주인공 시라노, 록산느, 그리고 크리스티앙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순간이다. 이곳에서 록산느와 크리스티앙은 첫눈에 반하고, 시라노는 자신이 짝사랑하는 록산느를 위해서 자신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이 영화가 사랑을 통해 예술을 은유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예술이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이 시퀀스에서 시라노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 그는 목소리로 처음 등장한다. 무대 위에 선 배우 몽플레뤼(마크 벤튼)를 비판하는 시라노의 목소리. 이 극장 시퀀스는 명확하게 두 계급을 나누고 있다. 과한 화장, 가발 등과 함께 자신을 최대한 화려하게 치장한 귀족들과 꾸밈없는 모습의 평민들로 나누어진 극장의 모습.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시라노와 몽플레뤼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평민들처럼 가발, 화장 없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시라노의 모습과 다르게 몽플레뤼는 그 누구보다 과하게 옷을 입었고 역시나 과한 화장과 화려한 가발을 쓰고 있다.



평민과 귀족, 즉 자본으로 나뉜 두 세계는 시라노가 몽플레뤼를 비판하는 순간에 예술에 관한 두 세계의 분리로 다가온다. 시라노는 몽플레뤼가 화려한 치장을 했지만 예술의 본질을 잊고 형편없는 연기를 펼친다며 손가락질한다. 그 순간 자본의 꼭대기에서 화려한 치장을 한 귀족들은 본질을 잊은 겉만 번지르르한 예술의 대변자들이 된다. 이 껍데기 예술의 대변자들은 자신들을 화려한 포장지로 둘러싸고 있지만 모두 하얗게 진한 화장을 하여 누가 누구인지도 구별이 안된다. 그것은 바로 뚜렷한 개성 없이 도식성에 잠식되어 있는 본질을 잊은 예술들의 모습일 것이다.


시라노의 비판에 몽플레뤼가 도망치고 대신 그 천편일률적인 예술을 대표하여 드 기슈(벤 멘델슨)의 수행원 발베르(조슈아 제임스)가 나선다. 발베르는 시라노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화장과 가발 없이 나섰다며 비난한다. 그러한 본질을 잊은 예술의 눈먼 비판과 함께 시작되는 시라노와 발베르의 결투는 발베르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시라노>는 이처럼 화려한 껍데기에 집중한 채 알맹이를 놓치고 있는 예술들에 대해 거칠게 비판하며 야심 차게 시작된다.





<시라노>는 한 여자를 두 남자가 동시에 사랑하는 이야기다. 보통 이러한 사랑 이야기에서 경쟁 구도는 두 남자 사이에서 형성된다. 다시 말해, 수많은 러브스토리의 작법을 따라간다면 <시라노>에서 경쟁 구도를 형성해야 하는 두 인물은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두 인물을 경쟁 구도 속에 집어넣지 않는다. 둘은 사실상 한 팀이다. 둘이 한 팀을 이루어 대항하는 적은 드 기슈다. 드 기슈는 영화 속에서 권력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을 속 빈 예술로 은유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드 기슈는 그러한 예술을 대표하는 단 하나의 인물쯤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런 껍데기 예술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 영화는 순수한 마음을 내세우고 있다. 시라노는 자신의 겉모습에 용기가 없어 크리스티앙의 모습을 빌리고, 크리스티앙은 자신의 글 솜씨에 낙담하여 시라노의 언어를 빌리는 방식을 통해 두 인물은 록산느에게 다가간다. 사랑이라는 순수한 열정이 그렇게 그들을 사실상 하나의 예술로 엮어낸다. 애초에 시라노가 크리스티앙에게 편지를 써주고 그 편지의 언어를 자신의 언어인 것처럼 대리하여 록산느 앞에 서는 크리스티앙의 모습은 영화에 대한 은유로 느껴지기도 한다. 대사와 배우가 만나 생겨나는 한 편의 영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은 이 순수한 열정을 토대로 한 예술(영화)을 바탕으로 드 기슈에 맞선다.  





그리고 결국 드 기슈는 록산느의 사랑을 얻지 못한다. 그는 욕망과 자극만을 탐하는 속 빈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시라노>는 시라노, 크리스티앙, 록산느 모두에게 비극적인 결말을 선사한다. 크리스티앙은 전쟁 중에 사망하고 시라노 역시 전쟁 중에 얻은 상처를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다. 그리고 록산느의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은 채 끝이 난다. 이 사랑이 비극으로 끝이 나는 이유는 순수한 예술을 열망했던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의 예술이 결국 온전히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 나가기 직전 록산느를 사랑하는 시라노의 마음을 알게 된 크리스티앙은 록산느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그녀가 둘 중 한 명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둘이 결국 하나가 되지 못하고 둘로 남았음을 의미할 것이다. 결국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은 하나가 아닌 둘로 남았고, <시라노>는 하나가 되지 못하고 실패해버리고만 예술에 대한 비극적인 결말과 함께 마무리된다.



이렇듯 <시라노>는 온전한 예술의 성공을 위해서는 예술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열정과 순수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훌륭한 하모니가 있어야 함을 말하는 듯하다. 비록 <시라노>는 사랑과 예술 모두 온전하게 완결되지 못한 비극적인 결말로 끝이 나지만 그럼에도 온전한 예술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그러나 결국 온전한 예술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지 못했기에 <시라노>가 던지는 이 예술에 관한 담론은 또 다른 숙제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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