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배트맨 (The Batman, 2022)
더 배트맨 (The Batman, 2022)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 관객들의 카메라는 누군가의 망원경이 되어 어딘가를 들여다보고 있다. 한 아이가 검을 휘두르고 곧이어 들어오는 한 남자를 그 검으로 찌른다. 거친 숨소리와 흔들리는 초점. 그러나 쓰러졌던 한 남자는 이내 벌떡 일어나고 검을 휘두르던 아이는 그의 품에 안긴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잭오랜턴. 맷 리브스의 영화 <더 배트맨>은 그렇게 누군가의 핼러윈 쇼와 그것을 염탐하는 시점으로 시작된다. 사실 이 오프닝 시퀀스는 <더 배트맨>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숨겨진 진실에 관한 쇼에 대한 영화이자,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염탐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염탐의 끝에서 이 영화가 발견하는 것은 희망의 횃불이다.
<더 배트맨>은 기존의 배트맨 영화들과 비교해서 분명하게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물론 팀 버튼과 크리스토퍼 놀란으로 대표되는 두 번의 배트맨 시리즈로부터 약간의 아이디어를 빌려오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브루스 웨인(로버트 패틴슨)과 알프레드(앤디 서키스)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웨인 저택의 모습은 고딕풍의 분위기를 풍기며 팀 버튼이 연출했던 두 편의 <배트맨> 시리즈를 떠오르게 한다. 여기에 더해 배트맨이 윙슈트 등의 현실적인 장비를 이용하는 모습은 놀란의 <다크 나이트> 삼부작 속 현실적인 배트맨 장비들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보이며, 영화의 중반부에 배트맨이 펭귄(콜린 파렐)을 만나기 위해 클럽에 들어가서 폭력을 행사하는 장면은 <다크 나이트> 속 배트맨이 마로니를 만나기 위해 클럽을 찾아갔던 장면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약간의 아이디어를 빌려오기는 하였지만 <더 배트맨>은 과감하게 오리지널로 회귀하며 앞선 두 시리즈들과 비교해서 분명히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원작 코믹스 속 전통적인 배트맨의 모습은 슈퍼 히어로보다는 탐정에 가깝다. <더 배트맨>은 그러한 오리지널로의 회귀를 선언하며 이 영화 속 배트맨을 슈퍼 히어로보다는 탐정의 모습처럼 보이게 만든다.
<더 배트맨>은 이런 탐정 영화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에 앞선 두 편의 배트맨 시리즈와는 분명한 차별점을 가지고 있다. 대신 이 영화는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과 닮아있다. 이 영화의 악역인 리들러(폴 다노)의 모습과 그가 하는 행동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조디악> 속 조디악 킬러와 유사하다. 복면으로 가린 얼굴, 암호문으로 작성된 편지. 그리고 리들러가 뉴스에 보낸 영상 메시지를 보면 그는 “This is Riddler speaking”이라고 말을 한다. 이는 조디악 킬러의 “조디악 가라사대 (This is Zodiac speaking)”에서 가져온 대사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범인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서서히 심리적으로 코너에 몰리는 배트맨의 모습은 핀처의 <조디악> 속 등장인물들이 처했던 상황과 유사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더 배트맨> 속 배트맨이 추적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진실’이다. 이 영화는 마스크를 통해 끊임없이 이러한 점을 강조한다. 리들러는 영화 내내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하며 자신의 일이 “오물통 같은 도시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결국 그 가면이 주인공 배트맨이 쓰고 있는 가면과 계속해서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영화 속 고담은 마스크를 쓴 자들에 의해 망가져있다. 겉으로는 시민들을 위하는 척하는 유력 인사들은 자신의 배를 불리기 바쁘며 시민들이 아닌 팔코네(존 터투로)를 위해 일한다. 그리고 이들과는 다르지만 배트맨 역시 가면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배트맨 역시 가면을 벗게 만들면서 성장 영화로서도 완성된다.
이 영화가 굴러가는 핵심 원동력인 ‘보이지 않는 진실’은 영화 속 악이 쓰고 있는 가면으로 대변된다. 진실은 가면을 썼기에 보이지 않는다. 이 ‘보이지 않는 진실’은 배트맨이 범죄에 맞서는 방식과도 겹쳐진다. 배트맨은 “공포는 도구다.”라고 주장하며 자신을 복수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그림자로 지칭하며 어두운 곳에 숨어 적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즉, 배트맨은 빛으로 나오지 않고 어둠이라는 가면을 쓴 인물이다. 그리고 그 어둠은 자기 파괴적인 동시에 폭력성을 동반한다. <더 배트맨>은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그가 빛으로 나오도록 한다. 아니 그 스스로를 빛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배트맨이 한 발 더 나아가게 한다.
홍수가 고담 시를 덮치고 위기에 빠진 고담 시민들. 배트맨은 직접 그 물로 뛰어든다. 그리고 조명탄을 터트리고 시민들에게로 나아간다. 그렇게 어둠이자 복수였던 그는 빛이자 희망이 된다. 시민들이 빛을 든 배트맨을 따라 나가는 모습을 부감으로 잡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더 배트맨>은 탐정 영화이고 영화 내내 끊임없이 배트맨의 발을 주목한다. 그것은 이 영화가 배트맨이 누군가의 발자취를 쫓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상적인 부감 장면을 통해 이 영화는 배트맨이 누군가의 발자취가 되는 영화로 변모한다. 그것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변화이면서 복수에서 희망으로의 변화이다. <더 배트맨>은 어둠이 아닌 빛을 믿는 영화다.
이 영화의 마지막 홍수는 구약 성서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신은 타락한 인간들에게 분노했고 그리하여 홍수로 그들을 심판했다. <더 배트맨> 속 홍수는 구약 속 그 홍수와 닮아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마지막 순간에 갈림길에서 서로의 길을 가는 배트맨과 셀리나(조이 크래비츠)의 모습을 통해 그러한 점을 강조한다. 이 홍수가 고담의 죄악을 씻어내는 치유를 상징하는 것인지, 아니면 고담을 덮친 또 하나의 재앙을 상징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배트맨은 전자라 믿고 셀리나는 후자로 믿으며 고담을 떠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배트맨의 눈을 주목하며 끝이 난다. 이 불분명한 고담의 운명 앞에 배트맨은 다시 한번 섰다. 그는 이 홍수 앞에서 방주를 만들 것이다. 그렇게 이 어둡고도 음울하지만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는 다시 한번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