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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로백수 Dec 23. 2021

"귀납법의 요리"에 발을 딛다

201223_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아버지에게 밥을 차려드린 저녁

"요리를 잘한다"라는 개념을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에게 "요리를 잘한다"는 건 "있는 재료를 가지고 뚝딱 요리를 해 내는 것"의 의미입니다.


말하면 입 아픈 바야흐로 '유튜브의 시대'

뭔가를 만들어 먹으려고 하면 레퍼런스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물론 '누구나 집에 트러플 오일 같은 건 있고, 수비드 머신이나 광파오븐 정도는 있는 레퍼런스"를 따라 요리를 하려면 재료나 도구에 대한 자본 투자가 어느 정도 이상은 필요하고, 같은 재료를 같은 방법으로 조리를 해도 최종적으로 나오는 아웃풋의 "때깔"은 개인의 매운 손끝이나 디스플레이에 대한 미적 역량이 차별적으로 작용을 하는 제약이 있긴 합니다만, 적어도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서 요리를 못할 수는 없는 시대니 까요 :)


저는 그렇게 "만들고자 하는 요리를 정하고, 그 요리를 하는 법을 검색해서, 찾은 방법대로 요리를 만드는 것"을 "연역법의 요리"라고 생각합니다. 요리하는 분의 손재주나 센스에 따라 분명 멋진 요리가 만들어지겠지만, 저는 보통 이 방법은 저처럼 요리를 잘 못하는 분들이 따라가는 방법이지 않나 싶어요. 원하는 결과물을 머릿속에 생각하고 요리를 시작하지만 요리에 대한 자신이 없으니 어떻게 될지 몰라서 일단 재료를 넉넉하게 준비하고, 재료를 다듬고 조리하는 과정에서 버려지는 것들이 많고, 그렇게 요리를 만들고 나면 주방은 각종 재료들과 기구들로 지저분해지기가 쉽죠. 또 메인 요리에 대부분의 신경을 쓰다 보니 메인 요리 이외에 식탁을 풍성하게 해 줄 사이드 메뉴나 디저트 류는 없거나 대부분 사 가지고 온 걸로 채워지는 경우도 많구요.


저는 가끔 손님을 치르는 방법으로는 이 '연역법의 요리"라는 것도 충분히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누가 식탁에 이것저것 올리네요. 맛있는 메인 하나에 좋은 술 한 종류면 충분히 멋진 파티가 되는 걸요 :)


하지만 이제 유사 주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그런 식으로 요리를 하다 보니, 냉장고에 빈 공간이 남아나질 않더라구요. 이전 요리 때 다듬고 남은 재료와 먹다 남은 요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매 끼니 같은 반찬을 먹을 수는 없으니 뭐라도 새로 하나 하게 되고. 그렇게 또 한 끼니가 지나가면 냉장고가 차게 되고... 그런 식으로 지내다 보면 분명 뭔가 계속 먹고는 있는데 냉장고에는 식재로나 음식들이 들어있는 락앤락 지퍼백들로 그득해지더라구요. 이런 식이라면 오히려 사 먹는 게 더 저렴하고 편할 것 같아졌어요 ㅋ


하여 오늘은 부모님과 같이 살기 시작한 후 거의 처음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 머리를 굴렸습니다.

'음... 야채칸의 저 양배추는 갈변이 심한데? 오늘이 지나면 버려야 할 것 같고... 김장이 끝난 뒤에 대파나 양파 같은 야채도 많이 있는데.. 저런 야채들을 다 다듬어서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야채만 드릴 순 없잖아. 음... 아 냉장고에 소고기가 있네?  그럼 야채와 단백질이 적당히 섞이니까.. 저걸로 오늘은 불고기를 해볼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오늘 저녁의 밥상 풍경이 아래에 있는 사진입니다. 무언가를 만들어야겠다고 재료를 사다가 한 게 아니라,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보고 무엇이 좋을까 생각해서 만든 음식이에요. 거창하게 말하자면 "재료들을 보고 요리할 내용을 생각해 낸 귀납법적 요리"라고 할까요? ^^"


요리실력이 없으니 여전히 딱 하나 불고기만 만들고 나머지 다른 반찬은 없습니다.

마음은 급하고 정신은 없어서 만들어야 할 것을 생각하고 나서는 유튜브를 검색할 생각은 못하고 그냥 기억을 더듬으며 요리를 했는데요... 전에 전에 어머니께서 명절 음식 데워먹는 법을 가르쳐주시면서 말씀하신  "아들아 불고기는 참기름 맛이 대부분이야. 양념에 참기름을 넉넉하게 넣고 설탕을 넣으면 맛있어져" 하는 내용을 참고해 간장과 참기름, 설탕을 넣었습니다. 양념에 조금 점도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괜히 물엿을 넣어봤구요, 냉동된 고기에서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아 다진 마늘도 넣어봤습니다. 불에 익힌 야채나 해동된 고기들이 흐물거리기만 할까 봐 식감이 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아삭거릴 콩나물과 버섯 그리고 나머지 냉장고 속 오래된 야채들을 몽땅 다져서 때려 넣은 음식입니다.


어떠냐고 한참 여쭤봤더니 들려주신 아버지의 음식 평은 "맛이 없는 건 아닌데 양념들의 양을 조금 더 넣었으면 좋았을 것 같고, 양념에 고추장이 한 숟가락 정도 들어갔으면 더 맛있었을 것 같다. 잘 먹었다"고 였어요. 뭔가 해드린 음식으로 한 끼를 차려드렸다는 뿌듯함도 있었지만, 저걸 치우고 나니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자잘한 야채들이 들어있던 지퍼백들이 없어진 게 너무 좋아요.


당장 내일 메뉴를 고민해야 하지만 오늘 밤은 오늘의 뿌듯함을 즐기며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다들 저녁 맛있게 드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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