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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어풍차 Dec 30. 2020

나는야! 밤 8시가 되면 사라지는 신델레라

-사랑방을 빼앗긴 그녀들의 이야기-


신발장 한구석에 두었던 운동화를 세제 물에 부린 다음 솔로 쓱쓱 문지른다. 새카만 구정물이 지지 않겠다는 듯 거품을 야멸차게 밀어낸다. 그럴수록 운동화를 더 세차게 벅벅 문지른다. 얼마를 지났을까 등에서 땀이 흐르고 구정물은 네가 이겼어하며 항복을 한다.


깨끗해진 운동화를 탈수해 햇빛이 들어온 베란다 창가에 나란히 세워 놓는다. 다 닳은 밑바닥과 솔기가 터진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헬스장에서 열심히 운동했던 흔적들이다. 창문 너머로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몇몇 아이들이 눈에 띈다. 그 옆에는 다른 아파트 사람들이 우리 아파트를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쪽문이 보인다.


아마도 이 문은 주로 우리 아파트 경로당 지하에 있는 헬스장에 오는 사람들과 대형마트에 가려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신데렐라도 이곳을 통해 헬스장엘 왔다. 그런데 이 문은 보안상 저녁 8시면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문을 닫는다. 그녀는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 운동을 하다가도 8시가 되려고 하면 헬스장을 빠져나갔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신데렐라였다. 

(아파트 사이에  있는 쪽문)

나는 집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이 헬스장을 무척 사랑했다. 아니 애용했다고 해야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헬스장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다 보니 외부 사람들보다는 근처 단지에 사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운동을 했다. 대부분 아는 사람들이고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같은 이웃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금방 친해졌다. 그런 특성 때문인지 거의 그곳은 사랑방 수준이었다.


" 00 엄마, 게시판 봤어. 성폭행범이 우리 아파트 가까운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대. 으으, 소름 끼쳐. 왜 하필이면 우리 아파트 단지 앞이야. 애들 밤늦게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해야겠어."


"뉴스에 보니까 전자 발찌도 소용없던데, 우리 아줌마 방범대라도 만들어야 되는 거 아니야."

8단지에 사는 신데렐라가 줄줄이 쏟아낸 새로운 소식에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보탠다. 운동을 하다 말고 우르르 몰려온 여자들이 헬스장 한편에 놓여 있는 테이블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우며 듣고 있다.


" 어어! 회원님들 운동은 안 하시고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여자 코치 말에 까르르 웃으며 일어나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운동기구를 찾아가 운동을 시작한다.

러닝 머신에서 얼마나 걷고 달렸을까 온몸에 땀이 흥건히 젖는다.


" 언니, 나 먼저 갈게요."

시계를 쳐다보니 벌써 시계는 5분 전 8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녀가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어어, 8동 신데렐라 벌써 가는 거야. 동화 속 신데렐라는 밤 12가 되면 마법이 풀리는데 8동 신데렐라는 마법이 밤 8시에 풀리는 모양이야."


이렇게 헬스장에서 하루하루 이런저런 우리의 추억이 쌓여갈 즈음 헬스장에 대한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코로나로 인해 위태위태했던 헬스장이 경영난으로 결국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었다. 제일 먼저 이 소식을 전한 사람은 신데렐라였다. 다들 그동안 정들었던 곳이 없어진다는 아쉬움에 운동하는 것도 잊은 채 서로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 있을 뿐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신데렐라, 너, 오늘 저녁에도 왕자님 만나러 갈 거지? 왕자님한테 이 헬스장 사달라고 해라. 으응, 제발."

우리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언니의 말에 우리는 그러면 되겠다고 맞장구를 치며 한바탕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허무한 듯 공허했다.


얼마 후 헬스장 문에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다는 안내문이 나붙었고 문을 닫은 지 3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곳에는 여전히 안내문이 붙어 있다. 가끔 지나다 들여다보면 헬스장은 옛날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고 금방이라도 신델레라가 언니 어서 와 왜 이렇게 늦었어하며 반길 것만 같다. 그러나 그곳은 지독한 마법에 걸린 듯 모든 것은 잠들어 있고 그 위로 까만 어둠이 내려 않아 있다. 그 마법은 과연 어떤 주문으로 어떤 사람이 풀 수 있을까. 마법이 풀리는 그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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