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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잉위잉 Mar 04. 2016

정신적 왼손잡이 - 프롤로그

20150611. #01. 시작.



    비가 온다는 예보는 듣지 못했다. 텔레비전은 5년째 보고 있지 않고 휴대폰으로도 그다지 뉴스를 본 일이 없다. 어제 이불빨래를 한 것은 괜한 헛수고였다. 그러나 좁은 방에 들어차는 에어컨 바람으로 어느새 잘 마른 모양이다. 아침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잠이 들다가, 옆집의 공사터에서 돌깨는 드릴 소리에  정오쯤 일어났다. 그러기를 한 보름.

    의사와 약속한 시간이 되어 병원으로 갔다. 눅눅한 날씨 탓에 머리가 무거웠다. 어제의 숙취 때문에 어지럽기도 했다. 메르스가 유행이라 병원 입구부터 난리법석이다. 체온은 정상이라며, 방균복을 입은 직원이 내 귀에 대었던 온도계를 떼어냈다. 손 세정제로 손을 닦았다. 마스크를 쓴 내 얼굴이 유리창문에 지나간다. 눈만 빼꼼하게 보이는 내 얼굴은 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 그녀는 상냥했다. 왜 정신의학과의 의사인지 알만했다. 그녀와의 독대는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주엔 설문지만 묵묵히 풀고 갔기에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다. 테이블은 넓고 깨끗하다. 의자는 안락의자. 책상 위엔 갑티슈 하나가 있다. 병력의 원인을 찾아 들어가다 보면, 으레 괴롭고 슬픈 일들도 꺼내놔야 한다. 내겐 그 정도 친절-갑티슈-이면 충분했다.



#1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게, 약을 먹으니 어땠느냐고 물었다. 약을 먹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 좋았다고 했다. 어떤 일이든 나쁘게 생각할 바에야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난 심리학의 흰곰 효과를 이야기했다. '흰 곰을 생각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흰 곰을 생각하지 않으려는 시도 때문에 흰 곰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  즉,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이 좋다, 이래서 싫다, 뭔가 맘에 안 든다, 나 자신이 싫어진다, 와 같은 '시비'의 가치를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이나 명제나 문장이 떠오르는 것이 좋다고 했다. '집 앞 샌드위치 가게는 오전 11시에 문을 연다', '냉장고에는 아이스크림이 있다', 같은 문장이 떠올라서 편안했다고.

#2  IBM: 이미 버린 몸


    그녀는 내게, 밥은 어떻게 먹고 있냐고 물었다. 자취 5년 차에 접어든 나의 식단은 대단히 부실하다. 더위를 많이 타기 때문에 여름엔 더욱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 20대 중반에 들어서자 위장 건강이 더 나빠져, 체할 바엔 빈속인 것이 편해 자주 굶는다. 그녀는 내게 음식을 더 먹으라는 이야기도, 어떠어떠한 음식을 먹지 마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잠은 어떻게 잤느냐고 물었다. 난 5시간 정도를 잤다. 보통 새벽 4시-6시에 잠을 청하는데,  휴대폰 게임을 하거나 이것저것 검색하다 잠들기 때문에 좋은 수면 습관이라 보긴 어렵다. 그 때문인지 자꾸만 선잠을 자고, 악몽을 꾸기도 한다.  그녀는 휴대폰을 보지 마란 이야기도, 일찍 자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난 음식은 귀찮고 잠드는 건 무섭다며 어린 애처럼 칭얼댔다. 그녀는 그것도 묵묵히 들었다. 컴퓨터 타자를 간간이 치기만 했다. 


#3  모범의 해악 


    "아침에 먹는 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군요"

    난 그 약을 먹으면 내가 멍청해지는 기분이 드는데, 혹시 지적능력에 부작용을 주지는 않느냐고 물었다. 장기 복용은 아무래도 좋지 않기 때문에, 자제해야겠지만 일단 내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답했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그녀가 좀 더 말을 이어갔다.

    "위잉씨는 스스로를 굉장히 많이 다듬고 정돈해서 보여주려는 사람입니다. 빈틈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죠. 능력에서든 말에서든요. 특히 어릴 때부터 곧잘 공부에 집착하는 모범생으로 지냈다고 하니 공부에서 특히 민감할 겁니다. 똑똑하다는 걸 자랑하고 싶다는 것도, 멍청하단 말을 듣는 것에서 크게 치욕감을 느낀다는 것도 그렇고."

    난 늘 내가 크게 기분 상했던, 혹은 차분하다가도 벌컥벌컥 화를 내곤 했던 몇 가지 말들이 있었다는 점을 떠올렸다. 학사 과정 공부를 하며 알았는데 그걸 '역린'이라고 하더라고. 

    "남이 나를 얕보고 무시할까 봐, 혹은 남들로부터 미움받을까 봐 그렇죠. 그러면 그만큼 빈틈없이 꼼꼼한 외면의 모습의 뒤꼍으로, 그만큼 깊이 해소되지 않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위잉씨의 증상이나 기호의 문제는 거기서 기인하고 있어요. 위잉씨는, 한 번이라도 나 자신을 가볍게 둬 보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 있나요?"
    날 보고 사람들이 '가볍다'고 말하는 건 욕이다. 사람이 가볍다는 건 진중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진중하지 못하다는 뜻은 어린애처럼 생각이 짧다는 뜻이고, 곧 멍청하다는 뜻이다. 난 그렇게 답했다. 


#4  입으로부터 나간 모든 말은 곧 나 자신에게 하는 말
비록 남에게 하는 말이라 하더라도, 그 말은 다시 내가 듣기 때문에,  곧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과 같다.

    최근에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은 마치 나비의 한살이의 어느 단계에 온 듯 새롭고 이상하고 불편하고 혼란스럽다가도 이상하게 즐거웠다.  지난달, 상사에게 그간 느꼈던 처우에 대해 내 입장을 표현하고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정말 좋은 사람을 잃어버리면서 다섯 번째 연애가 끝났다. 

   20대 중반쯤 이르면 상황으로나 삶 전체에서나 뭔가가 한 번쯤은 지각변동이 일어날 때라고. 지금까지 알던 방향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기도 하고, 그런 방법대로 문제가 풀리지도 않는, '뉴 제너레이션', 혹은 '뉴타입'의 것들이 다가온다고, 한 살 많은 모 선배가 언젠가 나를 다독이며 했던 말이다.


    "위잉씨. 사람은 말로 하는 것들은 남이 듣기도 하지만 그 말은 곧 자기가 듣는 말이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해요. 평소에 어떤 말을 많이 하는지, 요 근래에 가장 많이 한 말이나 행동들은 어떤 것이 있나요?"
    난, 특히 삶이나 인간을 조망할 때 아름답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주변에선 '정 없다', '냉소적이다'라고 타박하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 썼던 글의 첫 문장을 이야기했다. 


                나의 요원한 목표는 내 생일날과 제삿날을 최대한 가깝게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장난처럼 '아 그냥 아프면 죽지 뭐', '이러다 죽겠지 뭐'라는 말을 장난처럼 작년부터 참 많이 했었다. 요 근래에는 대화할 일 자체가 줄었으니 말을 잘 하지도 않고, 살고 싶다는 미련과 집착이 진해졌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한다. 


 실수로라도 내가 나를 죽이게 되면 어쩌나 하는 공포 때문에- 치료목적을 복기했다. 기억력과 상처는 자꾸만 말라 비틀어지고 있다. 급기야 망상이나 기억 소실까지 일어나면 - 난 내가 죽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죽을 지도 모른다. 



#5   당신이 다르다는 사실을, 당신이 알면서.

        
    "위잉씨는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일반인과는 생각의 무게나 톤이 달라서, 아마 남들이 하라는 대로 사는 게 절대 행복하지 않을 거예요. 본인이 가장 잘 알 거고요. 가족과의 세대차이나 갈등도 거기서 기인하죠. 가족들은 그저 걱정되기 때문이니, 그걸 고칠 수는 없어요. 집안의 막내라는 건 태어나면서 정해진 위잉씨의 역할이니까요. 위잉씨가 가족의 바람대로 스텝을 다 밟는다 해도 걱정은 끝나지 않으니까..."
나는 힘없이 웃었다. 너무나 정확해서.  난 언제나 타인에게 져 주는 편이다. 바득바득 갈등을 헤쳐가면서 이기는 일이 피곤해서다. 패배감의 부스러기들은 해소되지 않고 고스란히 적립된다. 


  최근엔 나의 가치를 발굴해주고 지지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낙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했다.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실행하기까지도 많은 시일이 걸렸다.  온몸에 족쇄를 차고서 살다가, 하나씩 하나씩 떨쳐내는 기분인데 그것이 한없이  느립니다,라고 말했다.

"위잉씨에게 필요한 가벼움이라는 건 그런 거예요. 자기 자신에게 좀 너그러워지라는 말이에요. 생각보다 찾아보면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게 채운 기준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조바심 내지 마세요. 위잉씨 스스로 자꾸만 자신의 안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밖으로 많이 다녀봐요. 오늘 들어보니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일들도 많다고 했는데, 그걸 해요. 다만 너무 조용한 곳에 있거나, 혼자서만 보내는 시간이 많거나 집에만 있지는 말아요."

#6  괜찮다는 말,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


난 기분이 울적하면 모든 약속을 다 취소하는 편이다.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사람을 굳이 만날 필요 없어요, 위잉씨. 당신은 외려 사람을 만나는 일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쓰고, 그걸 통해서 얻는 만족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에게 꼭 필요한 시간인지 아닌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사람을 만나라는 뜻이 아니라, 주변에 생동감이 느껴지는 곳- 내가 이 속에서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가끔 종종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 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천변에 나가거나 집에서도 음악을 항상 틀어놓는다고 했다. 그녀는 날 칭찬했다. 그런 부분에서  칭찬받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난 내가 싫다고 생각하는 편견에 일부러 쉴 새 없이 도전하고 부딪혀왔다. 정말 소극적이고 부끄러움도 많고 말도 가리지만 일부러 술자리에도 나가고 무대 위에도 올랐다. 무섭지만 눈 딱 감고 해냈던 일도 있고, 늘 동경하지만 남들의 시선 때문에 하지 않은 일도 많다.

'자, 해봤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만큼이야. 해보지도 않고 결정한 게 아니라, 이렇게 해봤어. 근데 나랑 안 맞아. 그래서 결정한 거야, 이제 됐지?'의 연속이었다. 지난 근 4년 동안은.
그리고 그렇게 애써서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다. 그래도 괜찮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일들과 사람들이, 드디어 나타났다. 



#7  정신적 왼손잡이


   대화를 마쳤다. 그녀는 혹시 나에게 글을 쓰느냐고 물었다. 나는 정식으로 문예창작을 배운 적은 없지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글 쓰는 건 단순한 소일거리처럼 한다고 했다.
     "다른 상담자들에 비해 스스로의 문제를 많이 진단하고 싶어 하는 편이에요. 말할 때도 완결된 문장으로 말하려고 하고, 비유를 들거나, 단어도 고급 단어를 쓰거나 신중하게 선택하거나 부언하는 식으로 대화를 구성하고 있어요. 아마 이 대화를 받아 적는다면 한 편의 좋은 글이 되지 않을까, 생각도 들 만큼요."


  난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조차 기억도 나지 않는데. 단 내 감정을 '마구' 털어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의사고 나는 환자이기 때문에 어떤 증상이 어떻게 시작된 것 같은지를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주절주절 '썰을 푸는 것'이 아니라 인과를 따져 정리해야 한다고 매 순간 생각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꿰뚫어봤다. 역시 전문가로구나. 
     "위잉씨가 그만큼 스스로 많이 다듬어가면서 매 순간순간 긴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깨가 뭉쳐 통증을 느끼거나 몸동작을 자주 움츠리는 것도 그 일례일 수가 있습니다. 계속 일어나는 문제 증상들은 그런 일의 반복으로 쌓이는 분노나 슬픔이 제대로 해소되지 않아서 자기 자신에게 다시 돌려놓는 식으로 발생합니다. 지금 얘길 들어보니 일상 속에 그래도 여러 가지를 변화시키려고 이것저것을 많이 시도한 한 주였군요. 다음 주까지는 약을 똑같이 일단 먹어보고, 한번 차도를 보겠습니다."


   언젠가, 같이 문학을 공부했던 친구로부터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위잉아. 넌 뭔가를 표현하고 창조하기엔 좋은 감성이지만, 조직생활이나 사회 속으로 녹아들어야 하는 일에선 참 많이 상처받을 성격이야"


   내가 진료실 문을 닫고 나오기 전에 그녀는 거듭, 당신은 결코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 특별할 것도 아니지만 무튼 다수 편은 아니라고, 그걸 알아두라고만 했다. 분포도를 그려보면 결코 중심에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양극단에 있지도 않은.  


     난 오른손잡이에 오른발잡이, 오른눈잡이다. 다만 정신은  왼손잡이쯤 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병원을  빠져나왔다.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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