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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잉위잉 Apr 15. 2016

정신적 왼손잡이#15.약이 떨어진 날

201601 22. 약이 떨어진 날


매해의 시작이란 분주하기 마련. 1월 4일부로, 같은 건물 층 내에 있지만 조금은 다른 일을 하는 부서로 옮기게 됐다. 결국 새로운 직무를 시작하게 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지난 4개월 간 이 곳의 분위기나 직무를 좀 알고 있으니, 덜 힘들지 않을까?'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역시나, 빗나갔다.

20살 이후 내 삶을 지배한 문장은 이거다.

"결과는 노력을 배반한다."



#1. 병원에 바치는 월차


이곳은 월차나 특근 휴가 제도가 잘 갖춰진 곳이라, 계약직 인턴에게 하루 연차가 있다. (이전의 직장에선 없었다.) 늘 반차로 뚝 쪼개서 진료를 다녀오곤 했다. 한 달 하루 있는 휴일을 나는 늘 병원에 써야 했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이어도 좋으니 좀 더 진료를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했다. 문제행동이나 중독에 관한 부분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약물의 종류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어서다. 그에 나는 동의했다.


쉬는 걸 생각할 수 없는 1월이 시작됐다. 새로 온 동료 인턴들에게 업무를 가르쳐주고, 회사 차원에서 시작하는 몇 가지 교육에 참석했다. 그러느라 밀린 일들은 고스란히 저녁으로 넘어갔다. 야근을 지양하는 분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었다. 하루에 무조건 끝내야 하는 일인데, 끝나질 않았다. 처음이라서 삐걱대는 부분이 있었던 것도 맞다. 그보다도 일의 호흡이 한 5배는 빨랐으므로 시종일관 조급함에 시달렸다. 당장 몇 시간 후에라도 일이 생길 수가 있었다.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의 수익, 명성이나 향후 비전에까지 영향을 줄만한 크고 작은 프로젝트가 내 손 안으로 떨어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오면 굳이 약을 먹지 않아도 곯아떨어졌다. 약을 먹으면 마치 기계 전원을 끄듯 잠들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도 불안했다. 커피와 간식이 늘었다. 약의 부수 작용인 구갈(입 속이 마르는 것)은 심리적인 요인까지 더해져 더욱 심해졌다. 입술에선 가끔 질질 피가 흘렀다. 휴대전화 볼 틈도, 떨어진 세제와 휴지를 사다 넣을 생각할 틈도 없었다.


약이 다 떨어져 간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진료일에 맞춰 반차를 신청하는 일도 당연히 잊어버렸다.



#2. 혼돈


"이번 주에 월차를 못 써서요. 죄송합니다. 한 주 뒤에 갈게요."


예약을 미루는 전화는 사내 내선전화로 했다. 내 앞에, 내 이름으로 전화기가 들어왔다. 그 번호는 내 명함에도 새겨졌다. 말단인 나를 찾는 전화는 별로 없었다. 주로 취재처에 문의할 때 내가 먼저 전화를 하는 편이었다. 사적인 전화는 휴대전화로, 사무실 밖에서 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조차 불안한 것이다.

그래도 남은 약이, 한 삼일 분은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었다. 집 청소에 다소 무심하기 때문에, 약봉지가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그중에 하나쯤은 멀쩡한 약봉지가 있겠지. 여분이 있겠지.


없었다.


대체할 약도 없었다. 


오전 약은 신경을 기민하게 해 줌과 동시에, 지나치게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게 조금씩 안정시켜주는 두 가지의 약이 들어있다. 언젠가는 저녁에 복용하는 신경 안정제를 주간에 두배로 먹는 용법도 썼었다. 혹시나 해서 저녁의 약봉지를 세어봤다. 모자라다. 게다가 밤에 제대로 잠들지 못하는 것도 그것대로 끔찍하다.


망했다,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일은 몰아닥쳤다. 난 그것에 쓸려갈 뿐이었다. 



#3. 약 없는 일주일


정신과 진료 이전까지 합해서, 이 약을 복용한 지는 1년 7개월. 원래 가장 문제 되는 증상을 급히 막기 위해 3개월을 바라보고 먹었던 약이다. 어째서 이것을 계속해서 처방받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도 이렇게 장기 복용한 것에 무척 놀라워했었다. 나의 약물치료 목표의 첫째는 이것의 장기 복용을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이것을 먹지 않는 일주일이 시작됐다.


출근길의 기분부터 역겨웠다. 통행로와 시간대의 특성상, 내가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대다수의 사람을 역주행해야 한다.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게 피하는 몸짓들조차 피곤했다. 버스 안에서는 정말 '다 죽어!'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구역질할 것 같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회사에 도착했다. 회의 시간에 듣는 모든 이야기가 '네 성과가 나쁘다', '네가 담당한 일이 잘못되었다', '이건 너의 실수다'로 들렸다. 사무실은 10층이다. 뛰어내리고 싶었다. 


회의를 마치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어제 청소를 했지만 더러워 보인다. 다시 청소를 했다. 항상 버벅거리는 인터넷이지만 꼭 중요한 걸 업로드할 때 버벅거렸다. 매일 만지던 키보드도 왠지 오타를 많이 내는 것 같았다. 휴대전화를 바꾸라는 홍보 전화가 오면 늘 정중하게 '제가 필요하면 먼저 연락드릴게요'라고 끊는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런 전화가 많이 오는 것 같았다. 업무의 맥이 자꾸 끊긴다. 그러면서 계속 고객사에선 요청이 들어오고, 내 담당 업무는 늘어났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는 말을 자르고 휴대폰을 책상에 던졌다. 그런 전화가 올 때마다 절망적이다. 죽어버리고 싶다.



#4. 숫자


오후가 되니 미칠 것 같았다. 배가 부른데도 식사하는 숟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한 그릇을 싹싹 비웠다. 자리로 돌아와 계속 입술을 물어뜯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귀가 터질 듯이 울리다가, 나중엔 이명이 들릴만큼 고요해졌다. 입술을 다 물어뜯고 입 안쪽을 물어뜯었다. 내내 뭔가 불만 있는 사람 같은 모습이었다. 손톱도 계속 뜯었다. 손에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손을 씻으러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모니터가 자꾸 흔들렸다. 의자를 끌어다 앉아도 눈은 계속 초점을 잃었다. 겨울인데도 묘하게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이마를 닦으니 땀이 났다.


"잠시 이리 와 보세요."


사고가 터졌다. 16시에 게시되어야 할 것이, 제대로 게시되지 않았다. 게시 예약을 잘못 걸었다. 급하게 확인했다. 오후 6시로 되어있었다. 지금 시간은 오후 5시. 이미 게시 보고엔 사고가 났다. 부사수가 '밤에 재발행을 하면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안심될 리가 없었다.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iOS 기기를 페어링 해서 쓰는 법도 알고, 한글 맞춤법도 알고, 커피 원두의 종류도 안다. 
그런데 시계를 읽을 줄 모른다. 

어지러웠다. 빙빙 돌고 있었다. 머리가, 눈이 빙빙 돌고 있다. 아우성을 친다. 뭔가 말은 하고 있는데 언어가 아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 책상 위의 전화번호, 색상 기호, 교정부호가 마구 뒤섞인다. 


16 빼기 12는?

16 빼기 12는?

오후 6시는?

오후 4시는? 
16시? 18시? 14시? 
2시?
4시?
16 빼기 2는?

16 빼기 4는?

24 빼기 16은?

16 빼기 12는?

16 빼기 12는?


16


12

?



#5. 대체재


"부끄러워서, 죽고 싶어서 그랬어요."


"사람은 완벽할 수 없어요. 누구나 실수하잖아요-"


"그건 실수가 아니라 - 그냥 병신이잖아요-!"


그녀가 차트를 본다. 그리고 절망하고 있는 나를 본다. 그것을 먹었던 1년 7개월. 그리고 그것이 없었던 7일. 이대로 약을 끊어내 버린다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이미 또 한 차례 무너져 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이렇게 시시껄렁한 실수가 생긴다면 그땐 더 격렬하게 죽고 싶어 할 것이다. 그녀도 그걸 충분히 알고 있다. 약대생 D는, 그 약이 지식이나 기억력에 영향을 준다는 보고는 못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장기 복용이나, 같이 먹고 있는 약이나, 음주 습관이나 여러 가지 변수가 있으니까. 


"약 기운이 빠져나가는 동안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어요.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한 달 동안이나 쉬라고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도 없고."


불가능. 절대로 불가능이다. 한국의 우울증 환자가 좀처럼 쾌차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것일 거다. 지겹도록 일해도 저축할 수 없는 것, 지독하고 미련하게 벌고 또 벌어도 쉴 수 없는 것.

"약, 주세요. 없으면 죽을 것 같아요."


약에 의존하고 있다. 부모님은 무슨 병이든 약에 의존하지 마라고 했지만-그게 말로 될 일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약을 먹지 않아서 죽는다기보단, 약을 먹지 않아서 생기는 이 혼돈에 잡아먹혀 죽을 것 같았다. 어라, 결국엔 같은 말인가. 


"비슷한 약으로 대체를 해볼까 해요. 더 이 약을 먹으면 2년간 먹는다는 건데, 이젠 더 이상의 초기와 같은 효력도 없을 거예요. 항정신성 의약품 중에서도 강력한 축이라, 여간해선 난 이 약은 더 처방하고 싶지 않아요."

뭐든 좋으니까...
비슷한 거라도... 그거라고 속이고 주더라도... 뭐라도 주세요, 제발.




#6. 이거야.


새로운 약은 동그랗고 넙적하게 생겼다. 귀엽게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면서 입에 털어 넣는다. 옷을 다 챙겨 입고, 건물 밖으로 나간다.


바람이 코 속으로 들어온다. 크게 들이쉰다. 스, 하고 크게 숨을 내쉰다. 

입에 침이 고인다. 


평화롭다.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볍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한 궤도대로 걸을 수는 있다. 버스 안의 사람들에게 죽어버리라고 소리 지르고 싶지도 않다. 죽어버리고 싶단 생각도 조금밖에 들지 않는다. 약간의 꾸지람은 조금 흘려듣는다. 글자도 키보드도 오늘은 똑바르고 가지런하다.


그래, 이거라니까... 이게 필요해... 


시계도 명확히 보인다. 포스트잇을 꺼내 몇 번이고 쓴다. 13시 - 1시, 14시- 2시, 15시- 3시, 16시- 4시... 다섯 번 정도를 반복해서 쓴다.  


조용하고 평화롭다. 

기쁘고, 비참했다. 그래서 속으로 조용히 울었다.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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