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잉위잉 Jun 10. 2016

정신적 왼손잡이 #27. 뭘 어떻게 누가

20160604. #27. 뭘 어떻게 누가

#1. 스스로를 감시


다른 의과에 다녀온 이후로 식사와 움직임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고, 운동을 했다면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 음식은 어떤 성분을 얼마나 먹었는지를. 보이지 않는 감시자가 생기는 기분이다. 이 의과의 의사는, 그녀에 비해 내 일지를 그리 자세하게 읽지 않는다. 그래서 대충 적지만, 괜히 음식이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고단백 저탄수화물의 건강한 식단이라고 생각하기 좋다. 하지만 일상의 대부분을 바깥에서 보내는 지금은 식사도 사회생활의 일부니까. 시끄러운 식당이 싫어서, 여유가 없는 것이 싫어서, 1인분의 식사를 늘 남기는 게 싫어서, 내가 식사를 남기는 걸로 동료들을 걱정시키는 게 싫어서 혼자 사무실에서 밥을 먹은 지 한 달이 넘어간다. 


다행히 이 회사는 누가 밥을 어떻게 먹든 그걸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밥은 각자 알아서 먹고, 일을 열심히 잘 하자는 주의). 그래도 단체 생활 문화에서 '다 같이, 같은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 눈에 띄는 모습이고, 흔히 겉돈다고 여긴다. 내가 대인관계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기 마련이고... 즉 식사가 사회생활의 일부라는 문화는, 이직을 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뭐, 차라리 잘 됐다. 음식을 먹어도 괴롭고, 먹지 않아도 괴롭다면 후자를 택하는 게 낫다. 저임금에 시달리면서도 원하는 일을 해 나가려면 식사비라도 아끼는 게 이득이다. 이 작고 미약한 음식도 맛이 없어 다 넘기지 못하는 날이 오면 오히려 기쁘기까지 하다. 몸은 풍선의 바람이 서서히 빠지듯 줄어들기 시작한다. 속은 늘 비어서 묘한 쓰림을 유지하고. 내가 바랐던 상태라고 생각한다. 껌과 물을 상비약 이상으로 챙겨 다니며, 식사 일지는 개발 괴발 갈겨쓰더라도 '감시'는 계속하기로 했다.



#2. 예견된 변화


기분 전환이라고 하는 것들을 그리 믿지 않는다. 기분이라는 것은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기분은 너무나 쉽게 망가뜨려졌고, 쉬이 정리되지 않았다. 기분은 봄 날씨보다 더 변덕스럽게, 뭍에 내쳐진 물고기처럼 괴롭게 허덕거린다.


주말에 머리를 다시 염색했다. 새 머리가 자라면서 한층 지저분해진 머리카락을 보다 못한 부모님의 권유였다. 나 역시 이견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더 '막장'인 스타일에 도전해보고 싶었기에 아쉬웠다. 아주 엉망이 될 때까지 머리카락을 혹사시켜 보고 싶었다. '이직한다면서 면접이든 뭐든 첫인상은 좋아야 하지 않겠니?'라는 말에 설득당해, 짙은 갈색으로 머리카락을 덮었다. 생각보다 색깔이 잘 입혀져 만족스러웠다.


마음이 달라지는 것은, 벼락 맞은 듯 갑자기 나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의 내가 숨을 보다 깊게 들이쉴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처한 이 상황이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이미 환경의 변화가 예견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약기간은 앞으로 3주 남았다. 

이직을 뭐 그리 대단하게 말하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3. 거기 누구 없소


작년 여름을 떠올리면 아직도 겁이 난다. 다시 숨이 막힌다. 무직 상태. 비경제활동인구. '똥 제조기'나 다름없는 쓸데없는 잉여인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었던 자괴감의 무게가 다시 한번 등허리를 쓱 스치고 지나간다. 


요 며칠, 퇴근 후에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자기소개서를 몇 번씩 쓰고 포트폴리오를 재편집했다. 길어진 해가 무색할 즈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좋아하는 만화도, 그림도, 글도, 음악도, 게임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약을 먹고, 지칠 때까지 전자피아노를 실컷 두드리다 자는 것이 고작. 


그렇게 좋아하던 애니메이션도, 만화책도, 다음 이야기를 보기 힘들어 덮어버린다. 승리를 갈망하고, 사람과 연대하고, 공포와 맞서고, 자신을 이기려 애쓰는 그들을 보면 피가 새로 솟는 듯 가슴이 설레다가도 이내 슬퍼진다.  나를 믿고, 나와 함께 땀과 숨을 공유하며 같은 목표로 나아갈 동료가 있을까.


짧지만 남은 것이 많은 회사생활의 결과로는...


모르겠다.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 


※ 업무 인계와 이직 준비로, 창작활동이 많이 뜸해졌습니다. 기다려주시는 분들께 죄송하고 언제나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글을 미룰 수도 없고, 제가 그렇게 하지도 못할 사람이므로... 짧은 글로라도 소식과 이야기 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신적 왼손잡이 #26.몸의 통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