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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잉위잉 Mar 14. 2016

정신적 왼손잡이 #05. 남자와 여자

20150710. #05. 남자와 여자

    면접을 보러 여의도에 다녀왔고, 탈락했다. 입사라기보다는 대외활동에 가까워서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다만 나보다 더 불량한  옷차림에, 어리벙벙한 행동과 갖은 말실수로 빈축을 샀던 사람이 합격자 명단에 있었던 것이 조금 의아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1. 그냥 있어주기만 해도


   여의도에서 돌아와 눕자마자 낮잠이 들었다. 다시 하루의 경계가 흐려졌다. 탈락했다 하더라도 번거로운 일 하나가 줄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패배감의 후폭풍은 꽤 대단했다. 지나치게 노심초사했던 것이 그 까닭일까. 다음 날이 오는 것이 두려워, 나는 대학 동기 P에게 하루를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3년  전쯤, 내 하숙집의 물탱크가 고장 난 날 P의 집에 머문 일이 있었다. P는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어학 공부에 바쁘다며 P는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보다가 잠들었다. 난 음악을 듣다가 잠들었다. 

P가 있어서 문제행동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가 돌아간 이후의 일상은 달라질 게 없었다.

  P가 있어서 문제행동은 막을 수 있었지만, 그가 돌아간 이후의 일상은 달라질 게 없었다. 한 2, 3일간 체중이 급 늘었고, 소화불량이 생겼다. 외출이라곤 편의점에 가는 것 정도. 집을 치우지도, 씻지도 않았다. 빨래는 완벽히 말랐지만 개키지 않았다. 언젠가는 양치를 하고 나서 가래를 돋우자 목에서 피가 났다. 건강과 체력은 너무나 빠르게 닳았다. 2년 전에 대학 운동부 소속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나는 약해졌다. 



#2. 인간의 스펙트럼 


  성역할에 대한 고민 또한 우울증을 겪으면서 찾아온 일이다. 가족과의 문제도, 내가 일상에서 갖는 스트레스도, 학창 시절의 괴로움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출생의 배경부터.  그녀는 성역할의 부분도 한 번쯤은 짚어봤으면 좋겠다고 내게 늘 말해왔다. '운동부' 이야기로부터, 그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위잉씨는 2년 전에 운동부 소속이었다고 했었죠.  지난주부터 말하고 싶었던 것이, 위잉씨의 남성상과 여성상에 대한 거예요. 위잉씨 본인은 어떤 모습이 좋아요?"


   모든 것은 혼합체다.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나열된 이미지들의 연속. 


 "남자이고 싶은가요? 여자이고 싶은가요?"


   온다 리쿠의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라는 소설에 보면, 주인공이 다니는 학교의 교장은 성별이 모호한 인물로 나온다. 어떤 학기엔 여성으로 살고, 어떤 학기엔 남성으로 산다. 


난 내 성별을 전환하고 싶은 게 아니다. 다만 내가 지향하는 이미지와 내 현실의 이미지, 사회가 요구하는 이미지가 크게 어긋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는 혼란이었다. 그건 이미지이기도 하고, 역할이기도 하다. 


"성전환 문제가 아니고, 위잉씨가 어떤 쪽을 더욱 '선호'하느냐는 것이죠."



#3. 남자 그리고 여자


     고등학생 때, 어느  명절날.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늦은 저녁 막걸리를 따라놓고 겸상을 하는 동안 나는 기면증에 시달리다 풋잠이 들었다.  그때 들었던 나의 탄생에 실망해 응급실 문 앞에 엄마의 옷가방만 두고 매몰차게 돌아가 버렸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 아버지는 직업 특성 상 외국에 있었다. 아버지 당신은 슬하 두 자식의 탄생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엄마는 나를 혼자 낳았다. 혼자 낳고, 혼자 있었다. 


  어쩌면 나 때문에.


  태생으론 환영받지 못했을지라도-사회적 역할로는 반드시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당시엔 공부도 재능도 내가 훨씬 뛰어났다. 친척 어른들로부터 '위잉이는 좋은 대학에 갈 것이다'등등 성공의 기대를 받았다. 그 기대를 야금야금 먹으면서, 내가 환영받을 수 없었던 이유의 근거들을 조금씩 밀쳐냈었던 것 같다.  


   대학 입학 때문에 본가를 떠나 타지로 오면서, 많은 것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좋은 대학만 가면 끝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으니까. 어떤 자식이든 집 밖으로 내놓으면 당연히 걱정되기 마련. 몇 차례 가족들과 연락 문제 등속으로 다투다가- 절대로 유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굳혔다.

어느 역할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내성적이고 겁도 많고, 사람 대하는 일도 서툴지만 그걸 억지로라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강하게 다치고 부딪히는 일들에 나 자신을 집어 던져 왔다. 혼란스러웠지만 적당히 즐거웠다. 


그러나 무직에, 병들고 망가진 지금, 나는 그 어느 역할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4. 인정하거나, 성취하거나.


   "꼭 무엇 하나를 정하라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 때문에 자신이 혼란을 느끼고 힘들어한다면, 인정하거나 혹은 그걸 성취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그녀는 최근 가장 우려하는 일,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체중이 늘어난 것을 얘기했다. 내가 마르고 싶은 이유는 세련된 옷을 입고 싶어서도 아니고,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도 딱히 아니다. 지금 내 몸을 내가 가누기 힘들 만큼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면 편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체중이 더 늘어나도 옷을 살 돈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최저 체중을 기록했을 땐 작대기처럼 말랐었다. 그때의 '편리함'을 그리워하는 나를 보고, 그녀는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보통 위잉씨 또래의 사람들의 이유랑은 좀 다르네요."


그녀는 상담일지에 알 수 없는  꼬부랑글씨들을 볼펜으로 갈겨썼다. 유독 오늘은 그녀의 필기량이 많다. 


   "체중을 줄이는 일도 좋지만, 스스로를 편하게 두는 것이 제일 중요해요. 매몰되지 말고, 밖으로 나가야 해요. 위잉씨의 생각과 감성만큼은 이처럼 세밀할 수가 없거든요. 아마 원하는 걸  얻기까지 자꾸만 문제행동이 발생한다면 전 입원을 권하고 싶지만... 그럴 상황이 안 되는 것을 아니까."


나는  지난날, 선배가 말했던 '요괴'이야기를 떠올렸다. 

  

 "일주일만 딱, 다음 주 진료일까지 술을 끊어봅시다. 내가 쫓아가서 말릴 수도 없고. 그리고 약을 바꿀 테니 그것만 지켜서 먹어요. 약 잘 챙겨 먹는 것과, 술 끊는 거. 그거 딱 두 가지만 해봅시다."



#5. 어떤 아침.


눈을 떴다. 모처럼 기분이 좋은 아침이었다. 물론 기분이 나쁠 가능성은 곳곳에 산재해있다. 집 청소를 몹시 하고 싶다. 쓰레기를 치우고, 밖으로 나왔다. 내가 사는 곳은 여러 학교가 밀집한 곳이다. 교복 입은 어린 학생들부터 잘 차려입은 내 또래 대학생들도 많이 지나다닌다. 주거 단지가 넓게 형성된 곳이기도 해서,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모습도 많이 보인다. 카페 창가에 앉아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여자가 정말 아름답구나.', '남자가 참 훤칠하다', 라며 사람을 좋아하다가 돌아왔다.


...그러는 나는 누구이길래.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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