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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잉위잉 Jan 08. 2017

정신적 왼손잡이#36.그렇게 살 수 없어

20161107.#36.그렇게 살 수 없어


#1. 공부


10월 말부터 작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11월부터는 어학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방학을 맞이한 대학생같은 가을이 시작됐다. (물론 실제로 나의 대학생활은 그렇지 못했지만.) 근 1달 정도를 가족과 씨름을 하고 별의별 밀고 당기기를 한 결과물로, 안정적인 일상을 얻었다. 아르바이트는 강북구의 작은 사무직을 매일 5시간 씩 하며 용돈을 보태고, 학원은 회화와 문법 수업을 듣는다. 직업훈련 혜택을 받지 못해 학원은 부모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다. 그래서 얇고 소소한 책 한권도 씹어먹을 기세로 공부를 하게 된다. 


아무도 날 괴롭히지 않고, 새로운 것들은 나를 기쁘게 하는 일상이 생겨 났다.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문장을 쓰고, 표현을 익히고 그것을 발화하는 일은 즐겁다. 나의 대학 시절을 다시 한번 더 떠올리게 된다. 


강단에 선 교수로부터 전해지는 지식의 향연,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속기사 못지않게 필기하던 나. 강의 시간엔 동기도 선배도 내겐 말을 걸 수 없었다. 내 강의록은 시험기간 때마다 모두가 읽고 싶어 할만큼 수업을 고스란히 담은 기록이었다. 행복하고 투명한 문장이 가득한 책장은 몇 번이고 가로로, 세로로 대각선으로도 읽어보며 진미를 맛보듯 즐거워 했던 시간들. 더 나은 이론과 학식을 얻고 싶어 도서관 서가 사이를 헤매다 까무룩 졸음에 빠지던 날. 동기들과 술을 마시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비평으로 과제를 어렵게 했던 이론가들의 이름을 외치며 원망하던 종강일. 겨울 하늘을 까맣게 물들였던 너와 나와 우리의 학사모.


청춘이라고 말하는 시간에서, 내가 가장 정신적으로 가지런하고도 열띤 활기를 갖고 있었던 순간이라 함은,

-이전에 J가 내게 묻기도 했지만

-아마도 음악을 할 때와,


공부를 할 때. 공부를 하는 것은 나아가,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이다.  

그런 확신이 희미하게 생겨나고 있다. 



#2. K교수


모교인 대학과는 연을 끊다시피 하고 살아왔으나, 염치불구하고 연락을 취하게 됐다. 외국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해외 원서의 통번역과 출판에서도 명성이 있는 K교수에게 장문의 메일을 보낸 것이 10월의 일이다. 


문화연구라는 학문을 알게 된 건 K교수의 1학년 대상 개론 수업에서였다. 으레 1학년 때는 전공의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개론 과목들을 배우기 마련이다. 개중에서 맞는 수업들만을 골라서 2학년 때 수강하곤 한다. 그의 강좌는 4학년까지 모든 과정을 통틀어 3과목 밖에 되지 않았다. 그것을 꾸준히 들어 공부해나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 한 사람이 나였다. 안타깝게도 K교수의 마지막 과목은 4학년 때 들을 수 있는데, 그의 연구년으로 인해 수강하지 못했었다. 그는 정교수들 중에서 제일 젊은 사람이다. 또한 문화란 끊임없이 시대를 감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난 유학을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이 K교수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확신이 필요해서다. 아니, 확신은 됐고 조금이라도 내게 좋은 말을 좀 해줬으면 해서다. 


유학을 결정하고 내가 시달린 여러가지 말들은 대략 이렇다.


너 공부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도망가는 거지, 취직하기 싫어서?
그 나이에 워킹 홀리데이? 왜 이제 와서?
여기서 실패한 사람이 외국 간다고 달리 잘 되겠어?
너 거기 가서 놀려고 그러지, 공부는 핑계고?
공채 좀 떨어진게 어때서? 한 100번은 도전해야 하나 붙는다잖아. 왜 노력 더 하지 않고.
거기 가면 넌 외국인 노동자인데, 한국보다 더 힘들 거야.


내 맘대로 좀 살겠다는데 왜들 저리 말리는지, 난 그것이 언제나 궁금하다. 혹시 '바깥 세상이 사실 더 좋고 멋진데, 그걸 못 보게 하고 한국에 날 가두려고 다들 날 음해하는 건가?' 싶을 만큼 만류하는 의견이 많았다. 대부분이 나의 나이와 흥미, 재직 경력을 문제삼았다. 


이렇게 된 이상, 외국에 간 후에 다신 한국에 돌아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진다. 막말로,

자살을 한다 해도 거기서 죽어야겠다. 

그래, 가능한 시체조차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폭사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 소름끼치는 다짐을 하며 K교수를 만나러 갔다.


복작거리는 일본식 돈가스 집에서 식사를 했다. 그곳은 대학 시절 자취하던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음식집이었으나, 정식이 1만 3천원이기 때문에 사먹어 본 일은 없는 식당이었다. 나는 그것으로 대화의 시작을 열었다. 이 앞에서 5년을 살았건만, 와 본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K교수는 정식 두 개를 주문해주었다. 직장을 다니다보면 밥값 1만원은 납득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선뜻 잘 사먹게 되는 가격은 아니더구나. 


무슨 일로 한국을 떠날 결정을 하게 되었느냐.

....사회의 환멸이요.


그는 나를 겁쟁이 취급하지도, 의지 박약 취급하지도 않고 싱글싱글 웃으며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동안 그가 한 말은 단 하나.


"학부생 때 교환학생이라도 다녀오지 그랬어. 자네가 학교에 있었다면, 내가 많이 도와줄 수 있었을텐데 그게 좀 아쉽군. 유학을 졸업 후에 결정하게 되어서 말이지."




#3. 백세인생


식사를 마치고 K교수와 나는 카페로 갔다. 앞으로 통번역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운을 뗐다. 그는 화색을 띄며 '이번에 외국 영화를 봤는데, 꽤 번역을 잘 해놨더구나'라며 나와의 대화를 이어주었다. 


결과적으로 K교수와의 시간은 아주 유의미했다. 그는 할 일이 있어 오래 이야기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며, 나를 지하철역 출구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출국하기 전에, 한번 더 연락을 해 주게.


나는 멀어져가는 그의 등에 대고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눈 앞에 콘크리트 바닥이 들어 왔다가, 그가 사라지고 없는 지하철역 출구의 풍경이 나타났다. 




- 20대 후반에 유학이라니, 많이 늦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로 직장생활을 2년 했지 않느냐. 퇴사를 했든, 1년을 근속하지 못했든, 사회인의 삶을 살아 보았다는 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싫었든 좋았든, 넌 결코 시간을 헛되게 보낸 것이 아니다. 그 경험이 너의 강점이 될 것이다.


- 어학과 통번역과 문화사업 전반, 비전이 없다고 다들 만류한다.


통번역과 출판업 자체가 한국 사회 전반에 불황이라서다. 나 또한 요샌 번역 일은 잘 들어오질 않으니. 하지만 그건 전후 관계가 조금 다르다고 본다. 돈이 되는, 잘 팔리는 콘텐츠가 무엇인지,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떤 번역과 전략과 인력이 필요한지를 선행 연구가들과 담당자들이 모르고 있어서다. 그래서 줄곧 실패했던 것이고, 질나쁜 해석들만 오간 것이고 결국엔 '아, 이곳의 콘텐츠는 안 팔리는구나'하고 포기한다. 현재는 그 악순환의 연장이고.


- 모국에서도 언제나 휘청이며 살았기에, 외국에서 소수자로 사는 일이 참 이상하게도 두렵지가 않다.


난 네가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공부는 워낙 학부생 때도 잘 했으니 네 진학이나 성적을 전혀 걱정하진 않아. 서울에서 혼자 산 것도 꽤 오래 되었으니 자기 생활도 잘 할테고. 그곳에서도 네가 앞으로의 삶의 길을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실패한 것이 아니다. 더 헤매고 찾고, 이것저것 끌어당겨보고 뒤집어 써보면서, 서른 전까진 그렇게 해도 좋다.

나야 서른이 넘고 하니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려야했다만. 그래서 서른 전후로 무조건 앞으로 평생 먹고살 것들을 쟁취해야만 했고. 요즘엔 굳이 결혼에 얽매일 필요가 없지만 굳이 서른을 얘기하는 건, 그때까지가 가장 공부하기에도, 어딘가로 나아가기에도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가장 건강하고 힘이 넘치기 때문이다. 

보통은 마흔...그 후로는 도전도 생활도 두렵고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사람이 이젠 120살까지 산다는데, 가장 힘이 넘칠 때 앞으로 100살까지 먹고 살 것들을 찾아야 하니까, 서두르기는 해야 할 것이다. 



#4. 인생이 너무 즐거워 외로울 틈이 없는 것


- 다들 날 보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는가.


모두가 다 응원하는 일을 도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고, 그걸 헤치고 나아가는 걸 도전이라 한다.


- 지나친 피로로 인해 환멸만 남아, 식견이 좁아진 것 같아 공부를 시작하기 두렵다.

  

거기서 열심히 설치다가 답을 찾지 못하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 또 다른 곳으로 가도 좋다. 다만 통번역을 공부한다 했으니, 한국의 경험과 지식도 절대 놓쳐선 안된다. 양쪽을 모두 붙잡고 있어야한다는 걸 꼭 명심해라. 


- 유학을 결심한 내게 돌아오는 말은 불효자, 패배자, 도망자.
그래서 오기로라도 다신 그곳에서 돌아오고 싶지가 않다.


불효라. 나와 자네는, 우리의 부모세대를 거스르며 살수 밖에 없다. 예전같았으면 부모는 자식에 모든 걸 헌신하기에 그 자식은 부모의 말대로만 살아야 한다. 즉 우리의 부모 세대는 그들의 인생의 전부가 '자식'인 우리가 된다. 그러니 자식이 장성해 독립하면 부모 세대는 삶의 기력을 눈에 띄게 잃는다. 내 삶의 전부가 떠나버린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외롭고 우울한 노후를 보낸다. 나의 부모, 자네의 조부모 세대의 삶의 풍경은 대부분이 그러하다. 애석하게도 자신을 위해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 나의 잘못입니까. 부모의 잘못입니까.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사회와 시간, 시대의 부름에 부응해 살았을 뿐이다. 

쉽게 부연설명하자면 '너희는 다 컸으니 이제 너희들 맘대로 살아라. 우리도 우리 마음대로 즐겁게 살테니 명절 휴일에 괜히 들이닥쳐서 귀찮게 굴지 말거라.'하며 자신의 삶을 사는 부모 세대야말로 지속가능한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는 거라고 볼수 있다. 부모는 부모 당신의 인생을, 자식은 자식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


부모 자식이 서로 서운해하거나 하지 않으려면,
각자 자기 자신의 인생이 너무 즐거워서 외로울 틈이 없어야 한다.





#5. 우린 그렇게 살 수 없어.


...그러니 내가 유학을 떠나는 자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이것. 물론 서울서 홀로 살아온 자네라면 잘 해낼 거라 생각하지만, 재차 말해두고 싶다. 


내 인생의 전부가, 나의 바깥에 있으면 안 된다. 내 인생의 결정체, 인생의 가치는- 모든 우선순위는 나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그래야 어떤 변화가 불어닥쳐도 쉽게 넘어지지 않고, 세월 앞에서도 외롭지 않으며 인생의 행복을 더욱 오래 구가할 수 있다. 


세상엔 자네를 피로하게 한 환멸과 폭력, 절망과 함께-그것을 능가하는 신비와 새로움, 감동과 행복이 분명 흘러 넘치고 있다. 우리 세대는 부모, 가족, 나라, 이 작은 테두리에 갇힐 수도 없고 가두려 해도 가둬지지도 않는다.




K교수가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삼키며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각종 죄책감과 걱정과 혼란으로 맺힌 딱딱한 응어리가 조금씩 녹아내리는 듯 했다. 




'우린' 이젠, 이전의 세대처럼 살 수 없어.
그리고 '우린' 이제 그렇게 살아서도 안 돼.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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