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잉위잉 Dec 28. 2016

정신적 왼손잡이#35.장면 전환

20160906-20161015 #35.장면 전환


2016년 9월 5일부로 나의 네 번째 직장은 끝났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백수생활도 딱 보름이 즐겁다. 그 이후론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에 시달리는 고통의 시간이 시작된다. 늦여름의 자취는 길었으므로 대부분의 하루는 집에 있었다. 작년의 여름과 마찬가지로, 드릴로 벽을 깨는 소리가 이어졌다. 건물 인근 부지에 새 건물이 올라가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땅땅땅-하는 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1. 여름의 결과 


모든 앞뒤를 다 자르고 돌연 이야기하자면, 

이곳을 떠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결심했으며 결정을 내렸다. 

사실 돌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근차근히, 빠르게 이 모든 생각들은 진행되었다. 


그 계기라고 할만한 건 두 가지의 사건.


(1)


회사에서 나에게 디자인과 카피라이팅뿐만 아니라, 해외영업과 해당 관련 업무의 통번역(!)까지 맡기려고 한다는 사실을 회의 때 알게 됐다. '해외 나가는 것, 좋지 않아?'라고 웃어 보이는 사장의 미소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듣기로는 그 지역은 해당 국가의 우범지역이며, 땅값이 싸기 때문에 그곳에 해외 영업 사무소를 낸 것이라고 한다. '괜찮아, 난 재밌게 다녀왔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건장한 장년 남자 사장이다. 그리고 아직 난 내가 4대 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어떠한 지원이나 안전 보장 없이 해외에 갈 순 없었다. 외근 수당도 특무 수당도 없이 비행기 표값과 숙소비를 내주는 것으로 모든 걸 메우려고 했다. 그 와중에도 'H과장이랑 같이 가면 남자끼리니까 숙소를 하나만 잡아도 되는데 거 참...'라며 돈 아깝단 소릴 했다. 


또한 통번역 업무란 마땅히,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필요하다.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사업계획서와 사업 발표와 같은 중대한 사안을, 고작 '위잉씨는 뭐든 잘 하잖아.'라는 한 마디로 내게 떠미는 것에 경악했다. 차후에 나는 넌지시 물어보았다. 현재 나는 디자인 작업부터 고객응대, 보고서 작성, 카피라이팅과 기획까지 모두 하고 있으며, 이제 해외 영업과 번역까지 하게 되었는데, 혹시 디자인이라도 추가 인력을 선발할 계획이 없느냐고. 


없다. 위잉씨가 우리 회사에 들어왔기 때문에, 사람을 더 뽑을 계획은 없다고. 그렇게 확답을 들었다.


위잉씨가 있어서 좋다, 위잉씨가 일을 잘한다. 이 모든 것이 칭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과중한 업무가 맡겨지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다는 판단이 확고해졌다. 


"위잉씨는 뭐든 잘 하잖아."


칭찬이 이렇게 무섭고 진절머리 나도록 싫기는 처음이었다.



(2)


정말 희망하던 대기업의 특채, 면접에서 탈락했다. 

사실 나는 면접을 제대로 준비해 볼 기회도 없었고 어떻게 준비하는지도 몰랐다. 


황망했다. 그 사람들의 눈을 보고 어떤 말을 해야 하나. 학생 시절의 작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볼 때만큼의 자신감도, 내 경력에 대한 끝없는 자부심도-지칠 대로 지친 나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랬다. 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탈락 소식을 들었을 땐 반박하거나 화낼 힘도 없었다. 


난 면접 현장에서 줄곧 웃고 있었다. 웃기라도 해야했다. 아무리 '나와라, 제발 나와라'하고 내 안에 몇 번이고 주의를 주어도 나의 잠재 능력도 좌중을 웃기는 말 솜씨도, 일에 대한 콧대 높은 자존심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쥐어짜낼 것도 없는 빈 껍데기인 채로 면접장을 한 번 구경이나 하고 온 셈이다.


다만 붙었다면 - 지금의 결정은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명성을 가진 기업이라면, 지금보다 더 힘들게 일한다 하더라도 악을 쓰고 달려들고 싶다고 아주 입맛을 다셨었기 때문이다.


탈락 발표를 들은 날에도 난 그 지겨운 회사에 있었다. 

이젠 아무것도 없다. 정신도 몸의 건강도 바닥으로 처박혀서, 더운 여름에 푹푹 익어가는 지금이 아니었다면.


나는 합격했을까...?


그런 작은 아쉬움이 생각나면, 오른쪽으로 누워 자던 몸을 굴려 왼쪽으로 돌아 누웠다.

그리고 마침내 이 작은 회사를 퇴사한 날에는, 집으로 돌아와 소주 한 병을 모두 비웠다.




공채 떨어지는 게 뭐 어때서? 실패는 언제나 익숙하고, 괴로움은 24시간 내 곁에 있다. "그러나"...



#2. 떠남을 축하해


그 선배를 다시 만난 건 1년 만의 일이다. 그 사람은 여전히 친절하게 나 같은 요괴를 만나주었다.(https://brunch.co.kr/@wiingwiing/4) 다만 안색이 조금 나빠보였다. 이유를 물으니 이전에 비해 15kg 가까이 체중이 빠져 버린 탓이라고 했다.


선배는 석사를 마치고 직장을 구했다. 난 그가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10개월 정도 다닌 회사를, 조만간 그만둘 작정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사내에서 지속적으로 괴롭힘당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업무를 마구 몰아주는 것도 모자라, 인신공격과 무시 발언, 인격모독적 발언을 숨쉬듯이 내뱉다못해 지금은 사장 마음대로 자회사로 발령을 냈다고 한다. 굳이 4개월이나 더 있으려는 이유는 뭐냐고 했더니 '그래야 퇴직금이 나오거든.'이라고, 선배는 웃어보였다. 


공교롭게도 우리가 만난 곳은, 내가 그만둔 회사로부터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작은 카페였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목을 조여오던 여름날의 복잡한 심경을 다시 느끼는 듯 했다. 작고 포근하고 상냥한 카페에 들어가 찬 바람을 피했다.


커피가 나왔다. 선배는 내게 작은 드라이 플라워 꽃다발을 내밀었다. 


"한국을 떠나는 걸 축하해." 


라면서.


별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뭘 이런 걸 다 챙겨주느냐고 웃었다. 꽃은 꽤 예쁘고, 마른 꽃이었으나 향기가 남아 있었다. 다행히 우린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조금은 있었다. 그렇기에 나의 기나긴 실패담과 여름의 악몽도 울지 않고 담담히 이야기해낼 수 있었다. 


그는 저녁을 먹지 않아 배가 고프다며 빵을 주문했다. 그리고 입맛을 잃어 커피만 홀짝이는 나를 보며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난 네가 (공채에) 탈락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 회사 다니기 시작했다면 한국을 떠날 생각, 안 했을테니까."




#3. 장면 전환


현재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을 붙들고 있는 걸 '근성 있다'고 칭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썩어문드러져가는 거처는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가는 것이 현명하다...


....나는 이것을 몇번이고 되새겼지만 내가 정작 할 수 있다곤 생각치 못한다.


그것은 내게 크나큰 두려움이다. 

지금을 내려놓는 것, 떠나는 것, 그런 것들을 늘 '실패'라고 지탄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싫은 것도 무용한 것도 계속 억지로 해왔다. 고교를 중퇴하려 했던 것, 전학을 했던 것조차도 결론적으로 내겐 실패였다. 내 인생 최초의 가장 큰, 역사적이고도 충격적인 실패. 고교를 다니던 것도 어언 10년이 다 되가는 일이나, 고등학교의 이름과 그때의 삶은 잊을만하면 지금도 꿈에 나타나곤 한다. 


그래, 그때의 생각대로라면 이것도 실패일 것이다. 한국에서의 생존 실패, 취업 실패, 독립 실패.


선배의 그 말, '다행'이라는 말에 잠시 발 밑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내가, 이 사건을 스스로 선택하고 받아들이고 진행하는 자세는 어떤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떠나기로 결심한 것 말이죠. 막말로 '이판사판'같기도 해서요. 이걸로 누가 뭐라 해도 반박할 기력도 없네요."


네 꿈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여기가 싫어서 도망치는 것 아니야?
여기서 더 도전해보지도 않고, 네가 싫고 무서우니까 그냥 피하는 거 아니야?
어차피 외국이든 어디든 다 똑같은데? 가봤자 너만 손해야.
한국에서 못하는 사람이, 일본에 간다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니?


... 맘대로들 생각하라지. 확신은 그 어느곳에도 없다. 대단한 성공가도가 있다는 보장도 없이- 조금이라도 내가 젊고 기력이 좋을 때 떠나야한다는 것만이 확실하다.


"여기서 죽을 바엔 조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걸 갖고서 죽고 싶거든요. "


선배는 '내가 죽는다'는 말을 해도 눈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나를 보는 그 사람의 눈빛은 온화하고 다정했으며 한없는 응원과 상냥함으로 가득했다.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신적 왼손잡이#34. 돌아갈 수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