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702. #04. 요괴 이야기
열흘 중에 더 큰 병원을 가 보았지만, 특진이 아니라는 이유로 헛걸음만 했다. 간단한 문진임에도 기존에 다니던 병원보다 더 비싼 진료비를 냈다. 진료실을 나서며 내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이거였다.
"혹시라도 죽을 만큼 다치게 되면, 곧바로 응급실로 오세요."
우울증이나 정신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나, 병증을 겪어 알고 있는 사람들은 '힘내세요', '기운 내세요', '잘 될 거예요'라는 말은 웬만해선 하지 않는다. 정 없다고 느껴질 만큼 객관적인 말이 오히려 와닿기 때문이다. 처음엔 충격적이었으나, 이 대형 병원이 응급 외상 수술로 유명한 곳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인 후 집으로 돌아왔다. 약기운이 퍼져서, 버스 안에서 늘어지도록 졸았다.
무튼 내가 내린 결론은, 정신의학과 상담치료는 처음 다닌 곳에 꾸준히 다니는 게 좋다는 것.
#1. 애증의 가족
가족으로부터 전화가 왔던 저녁,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은행에 갔었다. 통화를 하다가 다투게 됐고, 결국 은행 입구에서 한참을 울었다. 호흡이 고르지 않아서 자전거를 몰 수 없었다. 한동안 은행 입구에 앉아 고개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쉬어야 했다. 작은 말 한마디에 날 송두리째 흔드는 가족들이 밉다가도, 그런 가족들을 사랑하는 게 고통스러웠다.
난 지금도 충분히 힘든데, 가족들이라도 제발 날 칭찬해주면 안 돼?
좋은 말만 해주면 안 되냐고. 좋은 말만 해줄 순 없겠지만 난 지금 좋은 말이 너무 듣고 싶으니까.
가족들만이라도 제발 나한테 좋은 말만 좀 해 줘.
가족이니까 막말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 말이나 다 하고, 다 들어줘야하는 관계가 아니라 더 소중하게 조심하게 대해야하는 사이 아니냐고 반문했다가 싸움은 커졌다.
참 역설적이게도, 이런 공개된 자리에 에세이를 쓰면서도 정작 난 가족들에겐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타지에 있는 내 가족들이 이걸 알면 당장에라도 그들 스스로를 원망해버릴까 두려워서다. 더 나를 사랑해주지 못해서, 더 날 챙기지 못해서 자책할까 봐. 난 나의 예민함이 가족들과 많이 닮아있음을 안다. 가족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대략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숨기고 있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한다.
가족들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내가 세상 끝에 몰려있을 때 언제든 다가와줄 것이다. 그걸 믿고 있기에 숨겨야 한다. 말 못 하게 괴롭지만, 아직은 내가 버틸 수 있으니까. 아직은 세상의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이겨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땐 좀 힘들었지만, 지금은 괜찮아. 나 충분히 강하고 믿음직해.'라는 확신을 안겨주고 싶어서다.
#2. 요괴 이야기
무직의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업용 증명사진을 찍으러 외출했다. 조금 먼 발걸음을 했다. 모 대학 앞의 단골 헤어 샵에서 머리도 손질했다. 알코올로 경직된 얼굴을 풀었다. 슬쩍 웃는 연습을 했다. 그 결과 1년 반 만에 찍은 증명사진은, 예상보다 괜찮았다. 멀리 나온 김에, 사진관 인근에서 절친한 선배를 만났다. 길고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분에 모처럼 제대로 된 쌀밥과 반찬류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당장 서 있기도, 숨 쉬기도 버거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위잉아, 난 널 보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든다. 난 너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본다.
"굉장히 신경이 많이 쓰이겠네요. 좋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기 힘든데 말입니다."
아니야, 위잉아. 난 이야기를 듣는 걸 아주 좋아한다. 그리고 난 너처럼 생각이 많고 스스로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요괴'라고 생각한다.
"요괴요?"
응. 사람들 세계에 태어난 요괴. 공생하려면 겉모습을 사람같이 하고 다녀야 해서, 그 변신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는 거야. 너의 본모습, 능력을 숨겨야 하거든. 때때로 변신이 풀리기도 하지. 요즘 네가 겪는 일들은 그런데서 오는 거야. 스스로가 잘못되었거나 고장 난 인간이 아니라, 그냥 '다른 존재'지.
"꽤 좋은 비유네요. 제가 특별해진 기분인걸요. 그럼 그런 요괴들을 만나 그 본모습을 들여다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선배님은, 요괴이십니까."
나? 요괴들이 날 찾아오니까, 무당이거나 뭐, 요괴왕 쯤 되겠지?
"......"
그러니까 널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거지.
"...."
위잉, 술 그만 마셔라. 다치는 것도 그만해라.
선배는 마시던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여름인데도 긴 팔 셔츠를 입고 있는 내 양 팔을 붙잡았다. 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당황한 나를,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날카롭게 주시하는 선배를 보며, 역시,라고 생각했다.
#3. 내버려두거나, 피하거나.
취업을 위해 포트폴리오나 작문에 골몰하는 일이 이토록 즐거웠던 적은 처음이다. 집에 혼자 있는 동안만큼 무섭고 참기 힘든 고통의 시간은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고양이 세수라도 하고 밖으로 무조건 나갔다. 걸어서 1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카페로라도 좋으니, 집 밖으로 나갔다. 거기서 글을 쓰고 공부했다.
그녀 역시도 내게 집에 계속 있지 말라고 했다. 고통의 흔적이 어디에든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잉씨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남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자신이 고통스러워했던 흔적들을 분명 집 곳곳에 남겨뒀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도 집에 오지 않을 것도 알고 있잖아요. 만약 가족이나 친구가 방문할 예정이라면 그걸 다 치워버리겠죠?"
그렇다.
"그 흔적들을 치우면서 '아, 다신 실수하지 말자'라고 다짐할 순 있겠지만, 한편으론 당시의 고통을 다시 떠오르게 하기도 해요. 그건 스스로를 더 괴롭게 하는 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집에 오래 있지 마세요."
그녀는 내가 방청소도 하지 않았고 며칠간 제대로 내 몸을 꾸미거나 다듬지도 않았음을 꿰뚫어보았다. 체중도 늘었고 운동도 거의 하지 않았다. 우울증이 심해지면 보통 두 가지다. 강박증 수준으로 깨끗하게 씻고 주변 정리를 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과 주변을 전혀 가꾸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 면접 사진을 찍기 전까지 고양이 세수와 양치 정도만 하고, 5일 정도 머리를 감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4.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녀는 나의 문제행동을 다시 진단하면서 물었다.
"위잉씨는 남을 해치고 싶은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렇다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공포영화나 고어물을 좋아하지도 않고요. 오히려 그런데서 비위가 약하다고 얘기했었죠."
그렇다.
"당신은 뭘 공격하고 싶어 하지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난 뭐라 대답할지 알 수 없었다. 취기와 악몽의 자국이 채 가시지 않아서 자꾸만 눈꺼풀이 떨렸다. 모든 인간에게, 그런 면은 있다. 달의 뒷면처럼. 그게 늘 나쁜 것이리란 법은 없지만-타인에게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은 면. 그러나 문득 나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면. 난 선배가 말한 '요괴'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녀와의 대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나는 몸살 기운을 느꼈다. 마른기침이 났다. 재활용 쓰레기통을 보았다. 빈 소주병이 한 6개쯤 있었다. 냉장고 속엔 또 먹다 남은 소주가 1병 더 있었다. 난 내가 언제 그런 음료 등속을 구매했는지도 잊어버렸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서, 냉수를 마시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스르르 낮잠에 빠져 들었다. 걷기만 했는데도 멀미가 났다. 물 조차도 체한 것 같은 답답한 기분이었다.
#4. 타인과 타인
낮잠에서 깨었을 때, 에어컨에서 물이 새는 것 같아 수리기사님에게 연락을 했다. 그가 에어컨을 고치느라 전동 드릴과 케이블 타이 등속을 꺼내 씨름하는 동안 침대에 멍하니 앉아 인형을 껴안고 앉아 있었다. 내 등은 고양이처럼 굽었다. 한낮에 젊은 사람이, 집에서 기진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것이 생소한 모양이다. 그는 수리를 마치고 돌아가며 내게 넌지시 말을 붙였다.
“거 왜 그리 아파 보여요. 에어컨 너무 자주 틀면 사람이 아파요. 강바람이라도 쐬러 가는 게 건강에 좋지요."
참 인정이 가득한 목소리라 듣기 좋았다.
에어컨에선 더 이상 물이 새지 않고 잘 작동되었다. 나는 재활용 쓰레기와 썩어가는 음식물쓰레기를 모두 내다 버렸다. 창고에서 자전거를 꺼내 천변으로 나갔다.
어차피 혼자. 어차피 내 인생. 결국 나 혼자. 그래 봤자 나 하나. 그래 봤자 혼자. 종래엔 나 혼자.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 말이 떠올랐다.
"인간, 말 그대로 사람과 사람 사이잖아요. 위잉씨. 사람을 만나요. 절대로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어요."
그리고 선배가 한 말을 떠올렸다.
사람인 척 애쓰는 게 힘든 줄은 알지만 여긴 요괴의 세계가 아니야. 그러니 '사람'을 만나라.
#5. 요괴의 소원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로, 누구도 날 이해해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누군가를 굳이 이해하려 애쓰지 않았다. 외로워도 괴로워도, 남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꾹 참는 걸 연습했다. 어딘가가 고장 나서 다신 고칠 수 없는 구제불능의 상태라고만 생각되었다. 그게 치부로 느껴졌다. 마음은 누구에게라도 안겨 엉엉 울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데도, 일부러 남을 모조리 밀어내고 열심히 숨었다.
이젠 이런 태도가 몹시도 어리석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한 주가 될 것이다. 좀 더 인간의 탈을 유지하는 데에 요령이 생기지 않았을까.
만화든 민담이든 전설 속에서든, 늘 요괴들과 도깨비들, 원령들의 요원한 목표는
- 인간이 되는 것이다.
정신적 왼손잡이. Fin.
※에세이 <정신적 왼손잡이>는, 필자 위잉위잉이 2015년 6월부터 현재까지 모 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통원 상담 및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기록한 치료 일지로부터 시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