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9월 28일, 96년 전 오늘 유관순 열사는 열여덟 나이에 서대문형무소 지하감옥에서 숨졌다. 무자비한 고문과 학대 끝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독립운동을 하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이라던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에 대한 사실 7가지를 소개한다.
1. 유관순 열사는 뜨개질을 좋아하고 장난기 많던 소녀였다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감옥 안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유관순 열사는 뜨개질을 좋아하고, 장난기 많던 평범한 소녀였다. 유관순 열사는 뜨개질을 좋아해 5촌 당질 유제경에게 손수 뜨개질을 해 모자를 선물하기도 했다. 또, 장난기가 많아 기도 시간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해야 하는데 "명태 이름으로 빕니다"라고 해 품행점수에서 낙제점을 받기도 했다.
2. 유관순 열사 키는 170cm에 달했다
유관순 열사와 같은 마을에서 자란 조카 유제한은 유관순 열사 생김새에 대해 "아래 위가 고르고 튼튼한 체격을 가졌다"고 말했다. 서대문형무소 수형자 기록표에 따르면 유관순 열사 신장은 5자 6치, 환산하면 169.7cm다. 당시 여학생 평균키는 150cm였으며, 유관순 열사는 매우 큰 편에 속했다.
3. 교장선생님이 만류했지만 '결사대'를 조직하고 3.1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는 김복순, 국현숙, 서명학, 김희자와 함께 '결사대'를 조직했다. 학생들이 다칠 것을 우려한 프라이 교장선생님은 교문을 막고 시위 참가를 만류했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는 담을 넘어 탑골공원까지 나가 만세를 부르고 돌아왔다.
4. 고향에서 벌인 만세운동으로 눈앞에서 부모를 잃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유관순 열사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유관순 열사는 직접 만든 태극기를 주민들에게 나눠주며 연설을 했다. 일본 헌병들은 군중에게 총을 쏘아댔고 유관순 열사 부모도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학살됐다. 유관순 열사도 이때 체포됐다.
5. 유관순 열사는 재판받던 중 일본인 검사에게 의자를 던졌다
유관순 열사는 아우내 장터에서 벌인 만세운동으로 공주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공주재판소 법정에서 유관순 열사는 "나는 조선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말했다. 일본인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하자 유관순 열사는 검사에게 의자를 던졌다.
6. 유관순 열사는 옥중에서도 만세운동을 했다
유관순 열사는 감옥에서도 여러 번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때마다 심한 고문을 당하고 매를 맞았다. 그러나 굽히지 않고 3.1 운동 1주년 되는 날에도 감옥에서 만세투쟁을 전개했다.
7. 유관순 열사는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유언이다. 유관순 열사는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