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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아침의 발명

by 지서원




사건의 발단


내게 아침은 항상 조바심이었다.

남들보다는 늦은 출퇴근을 핑계로, 아침 잠이 많다는 점을 내세워, 야행성 인간이라는 이유로 나는 언제나 오전이면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른 시간대에 시작하는 운동 프로그램을 등록한 적도 있다. 일과의 마무리를 내일 오전으로 미룬 적도 많다. 이는 상당 부분 실패했고 다시금 후순위로 밀렸다. 피로는 해가 중천에 떠야 어느정도 가셨다. 늦게 잠들었으니 이 시간에 일어나도 몇 시간 못 잔 거라며 정체 모를-정체가 분명한-목소리가 말을 건넸다. 그제서야 대충 점심을 먹고선 헐레벌떡 출근을 했다. 전적으로 피로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하루만 더, 오늘만 더... 하는 정신머리를 당최 이길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된다느니 새로운 국면이 필요하다느니, 속으로만 되뇌이던 3월의 어느 날. 나는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골절상을 입었고 발목에 철판을 대는 수술형에 처해졌다. 세상에나. 생애 첫 입원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입원 첫 날, ‘병동의 하루는 새벽 5시에 시작된다’며 팔뚝에 주사바늘을 꽂던 간호사가 내게 말했다.


아침 해가 밝을 무렵 잠에 든 적이 종종 있었다. 아니 글쎄, 그 시간대에 하루를 시작해야 하다니. 2주간의 입원 기간 중 이 부분이 가장 힘들 게 분명했다. 일상 속 나의 밤은 안전하고 고요했으나 내가 곯아떨어진 새 몰래 밝아버리는 아침은 대부분 심신을 번잡하게 만들었으니까.

링거를 주렁주렁 단 채 이런 저런 걱정을 하며 낯선 침대에 드러누웠다. 내일 밤은 하반신 마취를 해야 한댄다. 그 과정 속에 척추마취가 진행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폰을 켜들고는 메모장이나 다름없는 '나와의 카톡방'에 짤막한 메세지를 남겼다. '이건 유서가 아니다'로 시작해서 '다음 생엔 더 괜찮은 사람이 될게'로 끝나는 네 줄 짜리 메모였다. 물론 무사히 수술이 끝날 것이고 금방 다리의 감각이 돌아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처음 겪는 일이지 않나, 이 정도는 무서워 좀 하자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한 쫄보가 아닐 수 없지만 깜깜하고 낯선 병동의 천장을 보고 있자니 수술방을 훤히 비출 아침이 오는 게 껄끄러웠다. 그리고 그 날은 새벽 5시에나 잠에 들 수 있었다.




병동의 봄


수술은 잘 끝났다. 잔뜩 긴장하던 척추마취도 따끔하고 끝났다. 평소 경험할 일 없는 수면마취 때문에 눈을 꿈뻑 감았다 뜨니 모든 게 끝나있는 상태였다. 간호사 선생님들이 멍한 나를 돌돌돌 끌어서 다시 병실로 데려다 놨다. 하반신 감각이 돌아오기까지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고, 나는 다시 말똥말똥 해졌다. 지난 밤 긴장했던 게 무색했다. 밤새 걱정했을 엄마가 "너는 이제 뭐든 할 수 있다" 라는 웅장한 카톡을 보내왔다. 이제 2주간 잘 회복하며 퇴원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큰 일을 치른 기분이었다.


처음 3일간은 짜릿한 통증과 주사의 따끔함이 연타로 아침을 깨웠고, 그 이후로는 아프지 않아도 새벽 5시면 눈이 번쩍 떠졌다. 따뜻한 햇살을 맞는 것도 아니고 큰 소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바이오리듬이라는 게 진짜 있는 건지 아니면 몸이 ‘0교시' 시절을 까먹지 않은 건지. 그렇다면 왜 여태껏 아침이면 비실거렸던 건지. 신기하게도 병동에서는 하루를 일찌감치 시작할 수 있었다. 일찍 일어난다고 일찍 잠드는 건 아니어서 하루가 매우 길게 느껴졌다. 거저 얻은 것 같은 기분. 포상을 받은 느낌. 보너스 시간. 이른 아침에도 활기차게 환자들을 체크하는 간호사 선생님들이나, 잠에 깨자마자 걷기 연습을 하는 할머님들의 모습 덕분일지도 몰랐다. 저들처럼 나의 아침도 알차야지 생각했다. 이젠 잠을 줄일 수 있다는 자신감 비슷한 것도 생기더라.


남들의 출근이 한창일 시간, 옥상정원에 올라갔다. 회복기에 접어들고 생긴 오전 루틴이었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은 집 근처에 있는 큰 정형외과였는데 부대시설이 꽤나 잘 되어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좋은 병원이 있다는 것도 운이 좋은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옥상정원에 올라가서 물기 머금은 아침 공기를 느끼니 부쩍 봄이 온 것 같았다. 발을 헛디딘 날로부터 몇 주 지나지 않았음에도 당시의 온도와는 사뭇 달랐다. 쌀쌀했지만 포근했고, 새싹이 움트고 있었고, 하얗고 작게 핀 이름 모를 꽃이 예뻐서 사진도 찍었다. 이런 식의 꽃 나들이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만, 십층 옥상정원에 만나는 작은 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퇴원 후의 봄날을 기대하는 행복 회로 덕분 인거 같기도 했다. 우아한 척 휠체어를 밀며 자그마한 정원을 돌아보고 나서 병실로 돌아갔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었다. 아, 성실하게 느껴지는 나 자신. 아침형 인간이란 이런 기분이구나.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필연적 사건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목발을 3주는 더 사용해야 했고 집 안에서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해 보행을 도와주는 기구도 주문했다. 식사는 여러 군데에서 배달되었다. 엄마와 할머니에게서 하루에 한 통씩 전화가 왔다. 나의 엄마에게서 또 아빠의 엄마에게서. 이게 내리사랑이겠지 싶었다. 특히 할머니와 통화하는 일이 부쩍 잦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할머니는 내 생각보다 훨씬 농담을 좋아하셨으며 자주 웃으셨다. 다리를 다치니 할머니를 더 알게 되었다. 병동에선 5시면 저절로 눈이 떠졌었는데, 집에 오니 이전과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래도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고 매사에 일렁일렁 고마움이 일었다. 클리셰적이라 생각했다. 당연함 속에서 달리 감사할 것 없이 살던 내가 어느새. 쪼그려 앉는 자세가 신기하고, 별다른 제약 없이 샤워를 하는 일이 대단하고, 이제 막 꽃샘추위를 떠나보낸 4월의 끝자락에서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다는 게, 절뚝이며 좋아하는 영화를 보러갈 수 있음에 감사하다. 그리고 꾸준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조그만 변화들이 설명한다. 쉬어가야 하는 봄의 초입이었구나, 필연적인 시기였구나 라고.


병원엘 다녀왔다. 뼈가 거의 붙었다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짧아진 주변 근육들을 스트레칭하며 풀어주라고 했다. 그래, 조금씩 조금씩. 다리는 다 나았고 내 하루는 오늘도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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