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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Apr 05. 2017

우리의 시간이 그랬고, 우리의 모습이 그랬듯이

::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두산연강예술상을 수상한 김은성 작가의 신작 <썬샤인의 전사들>. 1부 100분, 2부 70분. 인터미션을 포함하면 장작 3시간이 넘는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의 흡입력은 실로 대단하다. 한 명 한 명의 내러티브는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처럼 마냥 친숙하고, 그래서 더 아프다. 새로울 것 하나 없는 이들의 서사는, 익숙한 만큼 더 소중하고, 더 진지하다.




유명한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던 작가 승우는, 뜻밖의 사고로 아내와 딸을 잃고 슬픔에 빠진 나머지 더 이상 작업을 진행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그는 그의 환상 속에 나타난 봄이와 아내. 그는 그녀들과의 대화를 통해 글을 다시 쓰겠노라 다짐한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병 선호, 상자 안에 홀로 갇혀 있던 전쟁고아 순이, 전쟁 때문에 숨을 참아내야만 했던 명이, 초경도 채 하기 전 위안소에 끌려간 막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조선족 중공군 호룡, 시 쓰는 인민군 군의관 시자. 이들의 이야기는 승우의 소설에서 만나고,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전쟁을 배경으로 한 옴니버스 연극의 전체적인 느낌은 박근형 작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를 떠올리기도 했고, 한 시대의 이념과 역사적 순간에 대한 조명은 이경성 작의 <비포 애프터>를 떠올리기도 했다. 다만 앞서 언급한 <모든 군인이 불쌍하다>가 전쟁 속 불쌍하게 죽어가야 했던 군인들에게 주목하고 있다면, 그리고 <비포 애프터>가 세월호라는 특정 소재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다면, <썬샤인의 전사들>은 좀 더 포괄적인 의미와 방향에서 한국 역사 그 자체에 접근한다. 한국 전쟁 그 이전부터 70,80년대를 거쳐 바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모두의 역사를 조각조각 끄집어내어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다시금 만들어낸다.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똑, 똑, 똑똑, 똑, 똑, 똑.
쉽게 열 수 없는 벽 사이로 들려오는 소리.

약속의 소리, 구원의 소리, 마지막 희망의 소리,
그리고 굉음의 폭탄 속에 파묻혀버린 비극의 소리
똑, 똑, 똑똑, 똑, 똑, 똑.    

                          
     
감각의 자극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옅어진다. 때때로 감각은 어느 순간 습관이 되고, 익숙함이 되어 더 이상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하곤 한다. 우리의 역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수한 비극과 공포의 조각들은, 안타깝게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익숙한 것 혹은 잊혀져가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에 반해 이 연극은, 그렇게 흩어져가는 것들을 꽉 붙잡다. 온 힘을 주고 그것을 손에 쥐어 보이는 연극이다. 곧게 쥔 주먹은 때로는 분노하고, 울분을 터뜨리다가, 이내 곧 애처롭게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역사 앞 우리의 시간이 그랬고, 우리의 모습이 그랬듯이.
     
무대는 ‘돌고 돈다.’ 돌고 돈다는 것은, 배우들의 인생사가 비슷한 맥락에서 반복된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우리 삶의 역사가 유사한 흐름에 따라 반복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극 중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돌고 돌다가, 어딘가에 걸려 넘어진다. 다음 장면이 닥칠 때마다 나는 ‘부디 너만큼은 넘어지지 말아’하고 연신 중얼대보지만, 아이들은 보란 듯이 또 넘어져버리고 만다. 역사 앞 우리의 시간이 그랬고, 우리의 모습이 그랬듯이.

                          

사진 출처 / 두산아트센터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룬 이 연극은 서사 자체만으로도 한국 현대사의 위태로운 비극을 환기시킨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세월호가 아닐까. 줄다리기를 하듯 팽팽한 목소리와 그에 반해 작고 무기력한 어른들. 예전처럼 번복되었고, 어쩌면 앞으로도 되풀이 될 지 몰라 두려운 아픈 그 날들. 그러한 시대적 불편함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분노할 것인가. 가만히 있을 것인가.
     
연극은 격렬하게 돌고 도는 세상사에서 나는 과연 어떻게 버텨내야 할지, 어떻게 살아내야 할지 나름의 방식을 제시한다. 분노와 무기력이 뒤섞인 세상에서, 아리고 쓰라리기만 한 세상 속에서 '용서'라는 방법을 알게 된 승우를 통해서 말이다. “용서한다는 건 미워한다는 게 아니에요. 용서한다는 건, 용서한다는 거예요.”

연극은 때론 연극처럼, 때론 소설처럼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흐름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꽤 연극다운 연극, 사람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연극이었다. 수없이 쓰고 또 펜을 휘갈겨 온 우리의 전사들이 떠올라, 나는 한 편으로 마냥 부끄러웠고, 한 편으로는 무척 감사했다. 엄청난 환상인 줄 알았는데 지독한 현실이었다. 그들의 오늘은, 나의 오늘과 만났고, 또 누군가의 오늘이 될 것이다. 내게는 그 사실이 크나 큰 위안이 됐고 위로가 됐다.
     
그러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여,
부단히 쓰자. 쓰고 또 쓰고 또 그렇게 버텨내자.
그렇게 버텨내는 당신들이야말로, 썬샤인의 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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