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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Apr 06. 2017

무인도를 탈출하는 단 한 가지 방법

:: 연극 무인도 탈출기


당신은 섬에 표류했다. 섬을 둘러본 결과, 먹을 것은 충분하며,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안락한 곳도 있다.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두렵다. 그곳에서 당신이 해야 할 유일한 일은 당신을 구하러 올 사람을 기다리는 것뿐. 무인도를 탈출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다. 그곳이 ‘무인도’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내게 안녕하고 인사를 건네줄 ‘네’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곳은 탈출해야만 하는 공간이다. ‘네’가 없는 그곳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간만이 오죽할까. 내게는 ‘너’는 존재만으로도 역시 그렇다. 나는 ‘너’를 통해야만 존재하고 ‘너’를 통해야만 숨을 쉬고, ‘너’를 통해야만 꿈을 이룬다.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너’를 통해서 라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 대부분의 상처는 그런 ‘너’로부터 비롯된다. 나보다 먼저 앞서간 ‘너’를 질투하기 때문에, 잘난 ‘너’와 못난 나를 비교하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외에도 ‘너’와 관련된 수만 가지의 이야기들. 그렇게 ‘너’라는 서사는 나를 천천히 무너뜨린다.


내가 사는 이유임과 동시에 내가 살고 싶지 않은 이유, ‘너’라는 존재.   




신림동의 한 지하창고에서 삶을 겨우 연명해 가는 두 청년이 있다. 동현과 봉수, 그들은 취업준비생과 백수라는 중간 지점에 놓여 있다. 봉수는 취업에 실패하고, 동현은 실업 수당으로 삶을 겨우 연명한다. 쌀 살 돈도 풍족지 않은 이 두 청년은 윗집 여자 수아의 설득에 넘어가 연극 공모전을 시작한다. 어느새 좁은 방은 바다 한가운데 무인도로 바뀌고, 그곳에는 봉수가, 이어 수아가 표류한다. 과연 그들은 무인도를 탈출할 수 있을까?


연극은 분명 이 시대 청년들의 꿈과 인생을 담고 있지만, 나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던 그 시선에 더 눈이 갔다. 봉수와 동현, 그리고 수아. 그들은 바로 ‘너’였다. 늘 봉수의 곁에 있는 동현, 동현의 곁에 있는 봉수. 그리고 수아를 향한 봉수의 마음과 봉수를 향해 점점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수아. 그리고 그건 분명, 함께 살아가는 '너'의 따스함이었다. 그 따스함에서 나는 작은 희망을, 분명한 행복을, 살아갈 이유를 발견했다.


따뜻한 이 온도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단 한 사람만이 있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무인도를 탈출하는 단 한 가지 방법, 단 한 사람의 기억과 관심.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외로운 섬에서 쉽게 '탈출'할 수 있다.







연극을 본 뒤 조연출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들.    


1. 왜 하필 일반 객석과 무대가 딸린 공연장이 아닌 ‘연습실’을 택했는지 궁금하다.

> 티오엠 연습실은 여러 선택지 중 하나였다. 다른 소극장들도 후보에 있었으나, 공연 기간, 대관비 등 여러 조건을 고려하였을 때, 가장 적합한 곳이 이곳이었다. 이미 <벙커> 시리즈나 <사이레이나>처럼 연습실을 개조하여 올린 연극이 있었고, 그 실험적인 방식을 도입해보는 것도 매력적일 것 같았다. 작업하면서 무대를 뒤에서 볼 수 없는 오퍼실, 관객과 밀접한 무대가 무척 흥미로웠다.  


2. 그 선택에 대해 어떤 의견이 오고 갔는지 궁금하다.  

> 좁은 연습실은 신림동 반지하 방의 분위기를 내기에 적절했다. 관객 역시 물리적으로 이를 느낄 수 있기를 의도했다. 고민했던 부분은 무인도와 반지하, 극 중 극과 극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반지하 방의 물건들로 어떻게 무인도를 표현할 수 있을지가 고민이었다. 무인도 생활이라는 하나의 연극놀이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싶었다. 휴지에 펜을 꼽아 낚시 의자라고 한다든가, 랜턴에 병아리 인형을 올려 치킨을 표현한다든가. 봉수가 완전한 원시인 복장을 하거나 실제로 불을 지피거나 한다면 극 중 극 놀이의 의미는 퇴색될 것이다. 극의 의미를 잘 살리기 위해 중점을 두고 고민했다.  


3. 청춘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진부해서 오히려 두려운 소재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 극을 만들면서 꼭 전달됐으면 하는 메시지가 있었는지.  

> 이 극은 취업준비 같은 것은 집어치우고 꿈을 좇아가라는 무책임한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극 중 극 놀이가 끝이 난 후에도, 봉수는 어김없이 취업준비를 하고, 작가 지망생 동현 역시 끝나가는 실업급여로 취업준비를 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봉수가 든 만화책이다. 자신이 한때 좋아했던, 하지만 잊고 살았던 것을 다시 손에 쥐어보는 봉수의 변화이다. 거창한 것은 없다. 삶을 대하는 자세가 조금이라도 변한 것에 주목하고자 했다.



   


그래, 삶을 살아가는 자세가 변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변화가 곧 혁명이고, 축제이고, 새 시작이 될 터이니.

극을 본 후의 나는,

이전의 나와는 분명 달라졌을 테니.


그 변화가 단 한 뼘에 불과하더라도,

단 한 움큼에 불과하더라도.


극장을 나서며,

잊고 있던 많은 것들에 대해 떠올려 본다.

이를테면 나의 어린 시절, 잊고 있던 꿈,

그리고 내 곁의 '너'까지도.


Anywhere you go, I'll always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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