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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Apr 07. 2017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 연극 프라이드



다른 문화를 알게 되고, 그 세계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는 것. 단순히 다른 나라, 다른 종교, 다른 인종에게만 국한되는 일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그 태도를 지녀야 할 대상의 범위가 훨씬 더 넓어졌다. 연극 <>에 등장하는 그런 이야기처럼.


이론적으로 말은 참 쉽지만, 실제로는 그리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건 '나'라는 자아로부터 벗어나 타자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이고, 도전이고, 과제일 테니까. 게다가 자아에서 벗어나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고, '시도', '도전', '과제' 따위의 일들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언제나 미루고 싶은 두려운 일이니까. 그래서 ‘이해한다’는 말은 그리 실천적이지 못한 단어 중 하나임을, 나는 인정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연극이 ‘시도, 도전, 과제’의 자세로 접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전혀 아니다. 연극의 주제는 분명 오늘날 가장 친숙하고도 여전히 낯선 '성 소수자'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겁거나 어려운 화법으로 풀어낸 것은 또 아니었다. 연극의 이미지가 받아들이기에 거북하다거나 수많은 이해를 필요로 한 것도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극장을 나온 뒤 나의 생각들을 한 글자 한 글자를 풀어가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미뤘고, 또 한참을 하릴없이 피했다.

                                                

<타자화 (他者化)는 특정 대상을 말 그대로 다른 존재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분리된 존재로 부각하는 말과 행동, 사상, 결정 등의 총집합>


그러다가 지인들과 '타자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이 연극을 내 언어로 풀어내기 힘들었던 이유를 조금이나마 어렴풋이 알게 됐다. 이 연극은 ‘경계’를 다룬 연극이었고, 때문에 나는 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경계의 선들을, 그 지독한 편협과 위선에 얼룩진 그 선들을, 어떤 방식으로 어떤 언어로 풀어야 하는지를 차마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의 머뭇거림은 그런 길 잃은 당혹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리라.




1958년과 2017년, 시대를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전개되는 이 연극은, 경계에 대한 누군가의 싸움과 투쟁을 보여준다. 그건 개인의 안간힘이었을 수도 있고, 얼굴 없는 집단의 투쟁이였는지도 모른다. 그 누가 됐든지 간에, 그건 분명히 강하게 운동하는 소용돌이였다. 그 어느 때보다 경계가 깊고 진하게 그어져 있던 1958년,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경계의 잔상을 지워내기 위해 축제를 벌이는 2017년. 연극 속에 나타난 1958년은 모두가 불행했고, 2017년은 모두가 행복했다. 그 강렬한 대비가 주는 충격과 진한 여운을 어찌 타자인 내가 감히 다룰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조심스러웠고, 그런 조심스러움은 당연 필연스러운 것이었다.


가장 인상 깊게 본 배우는 이진희 배우였다. 배수빈-오종혁-이진희 배우의 무대 위 합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작년 <킬 미 나우>를 통해 부자 관계를 연기했던 그들이 이번에는 연인 관계로서 임했다. 그리고 <>의 이진희 배우가 맡은 실비아는 여전히 <킬 미 나우>의 트와일라처럼, 대지 같았다. 대지 같았다는 표현에는 수많은 개인적 감상과 해석이 들어가겠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녀에 대해 느낀 감정을 가장 가깝게 표현한 언어는 정확히 ‘대지 같았다’ 는 표현이었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쓰라린 눈물을 삼키는 한이 있더라도, 묵묵한 흙이 되어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1958년의 실비아와 2017년의 실비아의 성격과 개성은 조금 다를지언정, 나는 실비아라는 존재가 있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실비아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 묻고 또 물었다. 무척 어수선한 마음이 들었다. 과연, 나는, 경계가 난무하는 이 세상 속에서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한 영화의 제목처럼, 과거의 시간들은 언제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혹은 그나마) 객관적으로 정의되고, 해석된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이야기는 언제나 끊임없이 살아 있는 생명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일은 이 경계가 어떻게 해석되고, 또 어떤 모양으로 자리매김하게 될지. ‘그들’ 혹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 과거에서 시작한 연극 <>는 정확히 오늘을 관통하며 흘러간다. 어제가 내일에 닿을 때까지,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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