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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Apr 08. 2017

전구는 북한말로 불알입니다

:: 다름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연극 목란언니



얼마 전 독일인 친구가 독일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다섯 가지를 물었다. 맥주, 축구, 옥토버페스트, 베를린, 괴테, 니체, 뮤지컬…. 매력적인 키워드들을 제치고, 나는 가장 먼저 "분단"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동독과 서독, 그 사이를 완고하게 가로막고 있던 장벽의 글자, 분단.
 

그 연상 작용은 아마도 나 역시 분단국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세계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가는 우리나라다. 남한과 북한, 한때 날카롭게 서로를 향해 총과 칼을 겨누며 싸웠고, 지금도 여전히 그 총과 칼을 겨누고 있는, 두 이념으로 갈라선 하나의 민족.

 

'우리'로 칭해지는 이 한민족은, 서로 다른 이념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고, 전쟁으로 싸웠고, 넘어갈 수 없는 견고한 장벽을 만들었다. 남북한과는 달리 이제는 완연하게 한 나라가 된 동서독의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나는 그 이야기를 곧잘 북한과 한국에도 대입해 보곤 했었다. 

우리도 저들처럼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도 정말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이 이념이라는 것이, 이 이데올로기라는 것의 실체가, 실은 국가를 보존하기 위한 허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이념은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고,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고, 하나의 목표를 도출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집단 내 인간에게 소속감을 부여한다. 소속은 곧 권위이자 힘이다. 소속되지 못한 자는 힘 없는 자, 배제된 자, 무력한 자다. 함께 싸울 공동체가 없기 때문에, 외칠 수 있는 목소리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그래서 소속되지 않은 자들은, 곧 비난과 무시의 대상이 되고 만다.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라서, 자신을 억압하고 굴복키는 한이 있더라도, 집단 내에 저 자신을 귀속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사람은 세 명만 모여도 권력관계가 생긴다는 말이 있다. 힘의 우위가 정해지고, 규칙이 생기고, 억압이 발생하는 사회(社會). 사회적이라는 말은 동시에 집단적이란 의미를 갖는다. 한 집단에 속하지 못한, 대개 '외부인'으로 칭해지는 이들은, 집단의 권력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공동의 약속인 규칙을 따르지 않기에, 외부인은 존재 자체로 '낯선 대상', 나아가서는 '폭력을 취해도 괜찮은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저 한 집단의 문화와 양식을 잘 알지 못할 뿐, 다를 것 하나 없는 똑같은 사람인데도 말이다.


목숨을 걸고 큰 돈을 들여 남한으로 온 사람 중 많은 수가 다시 북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이에 주목한 김은성 작가는 연극 <목란언니>를 통해 질문한다. 그들은 왜 북으로 다시 돌아가는 선택을 내린 것일까. 그들에게, 혹은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앞으로 우리는 북에서 온 목란과, 중국에서, 동남아에서, 살 곳을 찾아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고.


ⓒ두산아트센터 페이스북    

                          

안녕 낯선 사람, 

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빌어먹을 이념과 집단의 관습이 존재하기 이전에, 사실 우리는 모두 '개인'이라는 걸 유념해보면 어떨까. 물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무척 두렵고 무섭다. 집단이 아닌 개인의 얼굴을 쓴다는 것은, 곧 우리를 우쭐하게 만들었던 힘을, 그 힘을 타당하게 만들었던 소속감을 파괴해버리는 거니까. 나를 지탱하게 했던 소중한 권력을 잃어버리는 거니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권력은 원체 '헛된 의식'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거다. 본디 인간은 그 누구도 상대를 비난하거나 폭력을 행사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 그 사실을 나와 당신이, 우리가 함께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타문화에 대한 관용과 포용의 임무를 말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되돌아볼 줄 알았으면 좋겠다. 거울을 들고 먼저 찬찬히 비춰봤으면 좋겠다. 외부인의 시선으로, 타자의 시선으로, 온갖 권력을 손에 쥔 채, 제 몸에 묻은 겨는 보지 못하고 남의 모습을 깎아내리기 바쁜 그 자신을. 그리고 반성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얼마나 추악했었는지를,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그리고 그 과정을 거친 후에서라야, 진정으로 온 마음을 담아 서로에게 안녕하고 인사를 건넸으면 좋겠다. 이 집단이, 이 사회가, 이 나라가, 서로에게 서로가 낯선 존재임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움직임을, 그렇게 보여줬으면 좋겠다.



ⓒ두산아트센터 페이스북  



"북한에서는 전구를 뭐라 부르는지 아십네까?"


"불알입니다. 형광등은 긴 불알, 샹들리에는 떼불알이라고 합니다."

목란의 북한말을 듣고 있노라면 객석에서 여기저기 쿡쿡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건 단순히 북한말이 주는 희극성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다름에 꼭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기도 했다. 

나름의 희망 혹은 가능성이랄까. 

이렇게 웃었던 것처럼, 웃음으로도 충분히 다름의 장벽을 허물 수 있다는 희망이자 가능성.


한마디 한마디 말에 의해 그어지는 경계들,
우리는 향수에 겨워 경계를 넘어서게 되리라
그리하여 모든 장소와 하나의 화음이 되리라   


          



'갈등'은 생산적이다. 팽팽한 대립의 긴장에서부터 새로운 길이 탄생한다. 가끔 파국적 결과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대체로는 역동적인 과정에서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아니, 희망한다. 과정이 힘들어도 견딜 수 있고, 그 끝의 희망을 등불 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ㅡ 갈등葛藤의 드라마를 거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낼 것이라 믿는다. 따라서 갈등 해결은 갈등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칡葛나무와 등藤나무가 얽혀 더 굵은 줄기를 만드는 것처럼 새로운 국면이 떠오르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갈등이란 더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글이 찡하게 느껴진다. 연극의 제목이 ‘목란’이 아닌 목란 '언니’라는 것도. 이 땅에서의 삶이 각박하고 힘겨워 다시 북으로 돌아간 목란은, 경계 밖 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언니’였고 누나였다. 함께 뛰놀던 나의 친구, 나의 동무, 그리고 나의 가족처럼 말이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잃을까 봐 걱정하지도 말자. 더욱 더 적극적으로 갈등하고, 투쟁하고, 방황하자. 

그들을 위해, 우리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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