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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Apr 14. 2017

바뀔 수 없는 어제, 하지만 새로 쓰일 내일

:: 연극 비포애프터Before After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날이었지만, 그 날의 온도는 너무 싸늘했던 것 같다.

하늘은 차디 찬 비를 내렸고, 나는 너무 추웠다.


침울했고, 무거운 어깨가 아파 눈물이 났고,

겁이 났고, 무서웠다.


온 나라가 슬프게 내려앉았던 그 날.

두 번째 만나는 <비포 애프터>였다. 아마 재작년의 나는 이 연극을 노려봤던 것 같다.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울분과 분노,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묵직한 감정으로 슬프게 가라앉은 빈 무대를 하염없이 노려보았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도, 나는 매서운 눈빛을 쉽게 거둘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참 동안 컴퓨터 화면을 노려봤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묻는 사람도 있었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그대로 도태되어 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쓰고, 또 지웠다. 여기에서나마 기록하지 않으면 정말 그대로 전복해버릴 것만 같은 씁쓸한 기분에, 나는 애꿎은 화면을 매섭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20140416. 무대 위에는 빨간색으로 쓰인 그 날의 날짜가 보였다. 차갑게 쓰여진 경고 문구 같았다.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그 날의 시간. 절대, 되돌아갈 수 없는 그 날의 시간.


비포 애프터의 연극 전달 방식은 대부분 캠코더 화면을 통해서 전달된다. 캠코더 카메라 앞에 놓인 사람들은 자신의 얼굴을, 사진을, 그림을 비춰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 발화 과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화면으로 만난 세월호의 침몰, 말이 없던 국가, 파편이 박혀 뿌옇게 보이던 누군가의 왼쪽 눈까지. 캠코더와 스크린을 통해 비친 모든 시공간의 것들이 연극이 아닌 현실이고, 지나온 과거이자, 박제되어 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것은, 게다가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의 오늘이라는 것은, 나를 너무나도 슬프게 만들었다.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전달받고 미디어를 통해 이야기한다. (과연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느냐는 계속해서 번복되고 있는 문제점이겠지만) 누구와도 누구라도 언제든지 무한한 소통을 할 수 있음이 가능해진 이 시대에,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보이지 않는 높고 견고한 벽에 가로막혀 당연히 존재해야 할 공론의 장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서 있을 곳은 폴리스라인이 쳐진 광화문밖에는 없다. 대한민주주의공화국의 시대에 우리의 아고라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외쳐야 하는가.

   

대조적으로 연극 <비포 애프터>가 전달하는 방식은 디지털 미디어라기보다는 아날로그 미디어에 가깝다. 일방적인 전달 방식이다. 무대 위에는 보이지 않는 제4의 벽이 뚜렷하게 쳐져 있지만, 너무 투명한 나머지 무대와 객석의 경계에는 아무런 방해물도 놓여있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오른손을 들면 그들도 오른손을 들어줄 것만 같다.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들도 당장 대답을 들려줄 것만 같다. 마치 거울처럼 상을 비추는 이 모습에, 나는 한숨이 들끓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나가 라디오를 꺼버리고 싶었고, 춤추는 여자의 몸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국가의 왕관을 빼앗아 이 왕관의 주인은 당신이 아닌 우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잊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넘어서, 다 함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이 국가라는 거대한 힘에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지를,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바뀔 수 없는 before에 비해, 언제라도 새로이 쓰일 수 있는 after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는 차갑고 뜨거운 생각이 가슴 한편에 차오른다. 우리 시대의 아고라를 되찾을 수 있는 기준이 되기를.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모든 그 날들을 추모하며.   



 

ⓒ두산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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