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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Feb 09. 2022

들리지 않는 세계에 귀 기울이기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은 청각 장애를 가진 빌리와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공연 초반, 한 농인 관객이 이 극을 관람하려 했으나 자막을 제공받을 수 없어 공연을 관람할 수 없었다는 SNS 포스팅을 봤다. 농인 소재의 극이지만 농인은 볼 수 없는 극이라니. 얼핏 본 제작사의 무성의한 피드백은 영 아쉬웠지만, 해당 소재를 깊게 살피고 고민했을 배우들의 사정과 자막을 제공하지 않는 현장의 의도를 직접 보지 않고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는 않아 기존 계획대로 극장을 찾았다.


그래서 어쩌면 이 글은 청인 관객의 입장에서만 서술된 지극히 편협하고 주관적인 감상일지도 모른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부디 넓은 아량과 호된 꾸짖음으로 이 좁고 얕은 세계를 넓혀 주시길 미리 밝히며, 몇 가지 단상을 적어본다.


1. 농인을 소재로 한 청인 타깃의 극


원작과는 달리, 현재 진행 중인 국내 버전은 청인 관객을 타깃으로 한 아마 애초부터 배리어 프리 극으로 기획되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 장면의 연출과 표현 방식들은 청인 관객을 위주로만 고려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은 청인들을 향한 의도적인 텍스트와 대사, 여러 모양의 소리와 장면을 통해, 듣는 일이 그저 일상이었던 청인에게 들리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극의 인물들은 수없이 많은 말들을 주고 받지만, 그 안에서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은 대사의 정보가 아닌 컨텍스트Context, 맥락이다. 맥락은 텍스트로 단순하게 치환되지는 않는다. 영화 자막을 번역하듯 단순 텍스트로 번역을 하기 어려운 이유다. 더군다나 언어 중독자들이 가득한 빌리네 집의 대화는 더더욱 그렇다. 요란한 비유와 끝없는 설명, 계속되는 말싸움과 논쟁들. 이들의 대화를 들으며 관객은 정보가 아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체험한다.


2. 말이 되지 않아서 들리는 말들


극에는 빌리 가족들의 대화처럼 알아듣지 않아도 되는 말들이 있는가 하면, 심혈을 기울여 들어야만 하는 말도 있다. 예를 들어 극에서는 날 때부터 귀가 들리지 않는 농인 빌리가 등장한다. 빌리는 최선을 다해 청인들의 언어를 흉내 내지만, 청인이 듣기에 빌리의 말은 음성과 발음이 생략되고 모호한 불완전한 언어다. 빌리의 말은 텍스트로 번역되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주의 깊은 눈과 귀로 빌리의 입술과 소리, 문맥에 힘주어 집중해야 한다. 쉽게 소리를 듣고 이해하던 일상의 경험과는 반대로, 처음으로 들리지 않는 세계를 향해 최선을 다해 힘을 쏟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연극적인 경험은 관객들에게 독특한 경험과 시야를 선사한다. 들리지 않는 세계를 향한 공감과 몰입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빌리에게 수화를 가르치지 않았던 가족들의 배경이나 이유는 전혀 관심 없고, 그간 빌리가 겪었을 먹먹하고 까마득한 세계를 이해하기를 선택한다. 그 선택은 극이 끝난 후에도 유효하게 지속된다. 극장을 나서며 누군가에겐 불친절하고 온정 없는 이 세계의 소통 방식이, 우리의 일상 곳곳에 얼마나 많이 산재하고 있는지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3. 예술이라는 이름의 장벽


예술이란 때때로 참 웃기다. 가장 소외되고 외로운 자리를 살펴야 하면서도, 가장 고상하고 교양 있는 얼굴로 턱을 치켜세운다.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하는 영역이라 운운하면서도, 도슨트나 드라마 트루기의 해석 없이는 영 어려울 때가 많다. 말이나 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유일한 영역이면서도, 그 어떤 것보다 많은 텍스트와 이론이 존재하는 아이러니한 세계. 그런 의미에서 이 극 역시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잘 들리지 않는 장벽이 되기도, 누군가에게는 처음으로,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다가갈 수 있는 다리가 되기도 한다.


빌리의 가족들은 빌리가 여자친구 실비아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실비아가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일부러 입모양을 더 크게, 더 쉽게 말한다. 그간의 모습과는 다른 태도다. 이 작은 사건은 빌리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나아가서는 관객에게까지 큰 파장을 일으킨다. 일상이었던 세계가 실은 불평등하고 위태로운 세계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극은 위와 같은 연극적 경험을 위해 비언어와 언어, 발화하는 대사와 속마음, 농인과 청인의 관계 등을 농인이 듣지 못하는 복잡한 맥락들로 힘껏 쌓아 올렸다. 그렇게 예술이라는 이름을 위해 불친절하게 쌓아 올려진  극은, 모순적이게도 그래서 다시 예술이란 이름을 통해 장벽을 허무는 경험으로 이어진다. 극을 나서자마자 농인의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 장벽 없는 세상을 함께 향유하길 바라는 마음들이 여기저기서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들은  장벽을 허무는 시도들로 분명 이어진다. 그래서 극의 선호 혹은 불호의 감상을 떠나서, 지금 바로 이곳의 장벽을 허물자고 외치는 객석의 움직임이 내심 다행스럽고 뜨겁다.


자크 데리다는 텍스트 밖의 세계는 없다고 말했다.

이 세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만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텍스트 밖의 세계도 분명 있다.

비록 '만약'이라는 단어를 갖지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장벽 없는 내일을 기대하고 상상하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 분명 있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 밖의 세계는 있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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