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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Jun 22. 2017

군중을 다스리는 교묘한 방법

:: 영화 더 랍스터



영화 <더 랍스터>는 두 번째 보는 영화였다.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영화 재관람은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상과 두 번째의 감상이 이렇게나 확연히 달라진 것을 직접 체험하고 나니, 영화는 여러 번 봐야 하는 예술이라는 지루한 충고를 새삼 인정하게 된다.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의 사고가 이분법적인 의식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남성과 여성, 날 것과 익힌 것, 야생과 문명 등 인간의 사고는 이러한 이원적 대립에 익숙하고, 이와 같은 구조로 사고한다는 것이다.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은, 두 개의 대립 속에서 갈등하고, 판단하고, 선택한다. 이러한 사고는 꽤 합리적이다. 두 가지 대상만을 관리하기 때문에 시간적, 경제적 측면에서 효율적이고, 비교 대상이 아닌 것은 애써 고려할 필요도 없으니 덜 소모적이다. 영향력이 크지 못한 다양성의 범람은 혼란을 야기한다. 여러 의미에서 이분법적 방식은 ‘통제’하기 쉬운 사고다.
  

ⓒ영화 더 랍스터

  영화는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이원적인 상징을 그대로 드러낸다. 렌즈 낀 남자와 안경 낀 남자, 44반은 없는 신발 크기, 양성애자는 인정되지 않는 성적 취향 등등. 그들이 사는 세상 자체도 그렇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로 만들어버리는 빌어먹을 사회 체제에 눈이 갔다면,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더 넓은 의미에서 사회가 강요하는 것들, 그리고 그런 억압과 강압을 익숙하게끔 만드는 은밀한 술수가 보였다. 그건 분명 '사랑에 관한 기묘한 상상'에 뒤섞인 현실의 이면이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는 체제에 반역하는 사람은 당국에 의해 '증발'된다. 반역하는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하고, 그와 관련된 인쇄 기록, 정보, 사실 등은 모두 삭제되어 사라진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있었던 사람이, 이내 바로 증발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주변의 반응이다. 사람들은 누군가 사라졌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점점 누군가의 부재를 인지조차 하지 못 한다. 부당한 죽음에 익숙해지고, 증발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아마도 사람들 속에 깊게 침잠한 두려움이라는 것이 그들의 기억과 감정을 왜곡 혹은 망각하게 만드는 방어기제를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두려움에 굴복한 사람들은 저항 대신 항복했고, 체제의 전복 대신 묵인과 복종의 방식을 택했다.


ⓒ영화 더 랍스터

  <더 랍스터>의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대해 반발심을 갖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동물이 되어야만 하는 비논리적인 규칙에 대해 타당한 설득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다.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규칙을 따르고, 그 규칙 속에 살아남기 위해 버텨낸다. 두려움은 군중을 다루기에 늘 효과적이며, 그래서 두려움은 공동의 안정을 위한 필수적 요소다. 정해진 규칙을 어긴 사람은 처벌을 받는다. 그 사람이 규칙을 어긴 이유(혹은 나아가서 규칙이라는 제도 자체)가 정의로운 의의를 지녔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규칙과 처벌은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고, 공동체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처벌은, 즉 불복종이라는 죄의 대가는 군중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 군중의 두려움을 팽창시키기 위해, 혹은 처벌의 형평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대개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작용한다. 대개 사람의 욕구는 그 자체로 죄악이 아니다. 법이 그것을 금지하기 전까지는. 집단의 안정을 파괴하는 불복종보다 더 큰 악은 없기 때문에, 이유가 어찌 됐든 집단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곧 ‘유죄’다.


ⓒ영화 더 랍스터

  환상과 거짓을 통해 군중 심리를 조장하는 권력층의 은밀한 정치 이데올로기는 영화 흐름 속에서 군데군데 묻어난다. 영화는 ‘사랑하지 않으면 동물이 된다’는 상황을 전제하고 있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은 정말 동물이 될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다소 충격적인 설정에 대한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한 씬, 아니 적어도 한 컷 정도는 동물이 되는 기괴한 과정을 얼핏 시각적으로 비춰줄 법도 하지 않을까.

  하지만 영화 속에서 동물 변이에 대한 설명은 오직 말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호텔에서 짝을 찾지 못해 늑대가 된 어머니, 개가 된 형에 대한 간접적 체험의 고백만 있거나, 동물을 만드는 끔찍하고 충격적인 과정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이 웅성거린다. 사냥에서 잡힌 숲 사람들은 호텔 안의 사람들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카운팅되어, 이를 보는 이들의 두려움을 다시 한번 자극할 뿐이다. 앞선 화면에는 45일의 유예 기간이 끝난 여자를 배치하고, 두 번째 화면에는 그녀의 금발 머리를 쏙 빼닮은 말 한 마리를 배치한다. 관객들(혹은 <더 랍스터>의 사람들)은 몽타주처럼 조각조각 조립된 화면을 통해, 그녀가 그 말이 되었을 것이라 자연스럽게 연상한다.
그녀가 정말 동물이 되었을 거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지만, 이를 의심 할 겨를도 역시 없다. 허공에 떠도는 무성한 소문과 말들이 그러한 의식의 틈을 꽉 틀어막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더 랍스터
ⓒ영화 더 랍스터

   데이비드가 고른 동물은 다름 아닌 랍스터다. 100년을 넘게 살며, 귀족들처럼 푸른 피를 지녔고, 평생 번식하는 랍스터. 그가 랍스터를 고른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표면적인 대사 그대로 단순히 그가 바다를 좋아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푸른 피를 지닌 귀족이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인 시선에서 혁명, 봉기, 체제 전복은 귀족의 영역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적 흐름에 의하면, 혁명은 대개 가장 낮은 계급 층의 봉기로부터 이루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에 피를 묻히며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귀족처럼 체제에 안주하는 편을 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랍스터를 고른 이유가 이러한 지점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더라도, 어쨌거나 그는 체제에 안주하고 순응적인 인물이었다. <더 랍스터>의 기괴한 세계는 그래서 존속될 수 있다. ‘왜 사랑해야 하느냐’고 항의하지 않는 사람들, 차라리 목숨을 끊는 편을 택할지언정, '왜 동물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그저 여성과 남성은 함께일 때 안전하고 행복하다는 과장적 연극에 고상한 박수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영화 더 랍스터

  군중을 다스리는 능숙하고 교묘한 방법이 은밀하게 녹아 있는 영화 <더 랍스터>.
이러한 해석과 감상이 독단적인 시선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이 부조리와 부당함을 발견하지 못한 채 정박해 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통일된 복장과 생활 습관을 강요받는 것부터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은밀한 개인의 사생활까지, 모든 것이 낱낱이 감시되고 통제되는 그런 세계에서 말이다.

  “Short sighted” 처음부터 끝까지 근시에 집착하는 데이비드는, 근시의 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된 자화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눈 앞에 놓인 <사랑>, <자유>, <행복> 따위의 가치들이 진정하고 고귀한 것이라 굳게 믿으며 저 너머의 것은 보지 못하는, 편협하고도 좁은 틀에 갇혀 제3의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는. 분명 근시는 일종의 병이다.

  한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힘은, 집단 내 개인의 행복과 안정에 대한 약속을 전제로 한다. 또한 그 행복과 안정을 보장하지 못하는 조직은 언제든지 새로운 집단으로 교체될 수 있고, 그러한 권력과 권리는 각 개인에게 달려있다. 부조리와 부당함이 가득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저항은 필수적이다. 때때로 저항은 선택이 아닌 의무이자 유일한 탈출구다.

  하지만 <더 랍스터>의 세계에서 이러한 부당함을 인지하고 있는 영웅이나 의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줄기의 희망조차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부재에 있다. 도시로 도망쳐 나온 데이비드와 근시 여인의 내일을 그려보다가,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찝찝하고도 답답한 감정이 심연에 겹겹이 쌓인다.

  너무 낯익어서, 그래서 더 낯설었던 세계, <더 랍스터>.
  과연 우리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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