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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Jul 24. 2017

그 날, 비포 애프터

::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생애 첫 장례식, 까만 옷으로 급하게 환복을 하며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없는 망자를 떠올렸다. 안타깝게도 그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못해서, 나는 몹시 서운했던 기억이 난다. 살풍경한 그곳, 나는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조차 몰랐다. 나는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 아득하기만 했다.
   부고는 언제나 예기치 않게, 그리고 반갑지 않게 찾아왔고, 그에 반해 의식과 절차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많은 것들은 상상했던 것보다 꽤 덤덤했다. 벌건 얼굴의 조문객들은 앞다투어 신발을 벗고 들어왔고, 망자의 가족들은 생각보다 씩씩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나는 먹다 남은 육개장 그릇을 치우며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장례식이 이런 거라면, 누군가를 추모하고, 보내는 일은 언제, 어떻게 하는 걸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한때 맨체스터에 살았던 리는, 이제는 맨체스터를 떠나 살고 있다. 추웠던 어느 겨울 밤의 화재 사고가 바로 그 기점이었다. 추운 밤, 가족들이 추울까 걱정이 된 리는, 벽난로에 장작을 피우고 맥주를 사러 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 장작에 붙었던 조그만 불씨는 거대한 화염이 되어 가족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자 끔찍한 참사였다.
   그날 이후, 그는 맨체스터를 떠났다. 그는 좀처럼 웃는 일이 없어졌고,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냈고, 취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에게 그날 밤은, 사랑하는 자식들을 잃게 된 끔찍한 화재 사고가 일어난 날이자, 그의 인생을 무겁고 고통스럽게 연소시키기 시작한 착화점着火點이었다.
   
    빼곡하게 채워진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잃어버릴 경우, 그 공간에는 틈이 생긴다. 이 틈에는 새로운 책을 구해 채워 넣을 수도 있고, 그 밖의 다른 물건을 두어 틈을 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경우는 다르다. 책과 달리, 사람은 결코 쉽게 대체할 수가 없다. 분실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영어 loss는 '죽음'이나 '사망'이라는 의미로도 함께 사용된다. 죽음이란 곧 사람을 잃는 것,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은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그 틈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의  상실은 가장 서글픈 비극이다. 그에게 맨체스터란, 서글픈 비극을 떠올리게 하는 고통과 아픔의 공간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하지만 사람은 나름의 대안이 되기도 한다. 리와 패트릭의 경우처럼 말이다. 패트릭의 아빠이자 리의 형인 조의 죽음 이후, 리는 형의 장례 절차와 패트릭의 후견 문제 등을 처리하기 위해 맨체스터로 다시 돌아온다. 자식을 잃은 리와 아빠를 잃은 패트릭. 그들은 느리지만 조심스럽게, 더디지만 조금씩 서로의 빈틈을 채워간다. 투박하기는 했지만, 상처 입은 두 남자는 서로에게 한 뼘 더 돈독해지고, 조금 더 따뜻해질 것이 분명했다. 과장된 연기나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극적 전개는 전혀 없지만, 그들은 미세하게나마 분명 나아가고 있었다. 회복을 향해, 재생*을 위해. 그래서 그들의 내일은 나름대로, 꽤, 희망적이다.
    상처는 완전히 아물 수 없지만, 굳은 살이 생기면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질 수 있는 것처럼. 완벽한 봄은 짧지만, 꽝꽝 얼었던 땅이 부드럽게 녹는 날이 분명 찾아오는 것처럼. 오랜 시간 정박해 있던 보트래도, 다시 요란스럽게 모터가 돌아가는 것처럼. 희망은 분명 그들에게 있었다.
   
*재생再生 : 타락하거나 희망이 없어졌던 사람이 다시 올바른 길을 찾아 살아감.



맨체스터 바이 더 씨

   향냄새가 자욱하게 타오르던 어느 장례식장의 풍경을 기억한다. 조문객들이 돌아간 뒤, 무섭도록 빠르게 적막에 잠겼던 그곳의 풍경을 떠올린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망자의 빈자리를 붙잡는다. 세수를 하다가, 길을 걷다가, 물을 마시다가,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나는 여러번 무너지고, 주저 앉아 한참을 울고 만다. 그때 알았다. 추모란 특정한 공간이나 의식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그리고 이따금씩, 아니 어쩌면 영원히 함께하는 것이라는 걸.
   아픔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리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내일이 부디 단단해졌으면 좋겠다. 완벽하게 안녕farewell하지 못하더라도, 부디 그 삶이 안녕安寧하기를 바란다. 비극 속에 움츠러든 그들이, 희망을 잃어버린 그들이, 천천히 그리고 씩씩하게 잃어버린 행복의 조각을 채워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슬픈 마음들 모두 안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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