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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Feb 27. 2018

작지만 단단한 숲, 리틀 포레스트

:: 영화 리틀 포레스트




작지만 단단한
청춘의 숲,
리틀 포레스트



ⓒ리틀포레스트 스틸컷


                                                              * 해당 영화 리뷰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는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한강, 희랍어 시간 中





ⓒ리틀포레스트 스틸컷


인생은 왜 게임처럼 리셋이 안 될까


생각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고, 마음 먹은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을 때, 그럴 때마다 리셋reset을 간절하게 원했던 적이 있다. 혹 내가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그래서 조금은 덜 후회할 수 있을 거라고. 지금보다는 백만 배쯤 훨씬 더 괜찮은 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세상살이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상상은 상상으로만 그칠 뿐이다. 나는 여전히 엎질러진 물을 닦기 바쁘고,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애써 담는다. 야속한 시간은 눈치도 없이 흘러만 간다. 시끄럽고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 내 삶만 엉망이 된 것 같다. 꼭 내 삶만.



ⓒ리틀포레스트 스틸컷


서울살이 실패 이후 혜원(김태리 분)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언제 누가 마지막으로 다녀갔는지도 모를 고요한 집.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혜원은 불을 때고 불을 밝힌다. 멈춰 있던 집의 시간이 오랜만에 후끈 달아오른다. 혜원의 엄마(문소리 분)는 젊은 시절, 친정이 모두 반대하는 결혼을 하겠다며 가족과의 연을 끊고 결혼을 했다. 그녀는 병을 앓고 있던 남편의 건강을 위해 어느 시골 어귀에 살림을 차렸다.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살면 아픈 몸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혜원의 엄마는 그 믿음으로 시골 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남편을 돌보고, 남편을 묻고, 제 딸을 기른다.



ⓒ리틀포레스트 스틸컷


반면 혜원은 자신이 자란 공간을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 서울로 올라가고 말 거라는 그녀의 욕구는 다부진 고3 혜원의 눈망울과도 퍽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혜원이 보란 듯 멋지게 출가하기도 전에, 혜원의 엄마는 먼저 집을 떠난다. 다부진 혜원의 눈망울은 아마도 그녀의 눈망울을 닮은 것이었으리라. 먼저 집을 떠난 엄마와 그 뒤를 이어 집을 떠난 혜원. 그리고 혜원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배가 고파서, 집으로 돌아온다.



ⓒ리틀포레스트 스틸컷


얼마나 오래 비어있을지 모르는 집에 돌아온 혜원은 듬성듬성 엄마를 추억한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은 곳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엄마라는 궤도. 그림자처럼 엄마 생각이 유난히 머무는 때는, 그녀가 요리를 할 때다. 엄마가 즐겨 해주던 음식을 만들어 먹고, 엄마가 떠오르는 밥상을 차린다.


요리는 삶을 닮았다. 끓이고, 짓고, 졸이는 요리의 모든 행위는 타이밍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재료를 골라, 적당한 양을 적당한 시간만큼을 살피고, 적당한 시간을 기다려 먹는다. 튀김은 갓 튀겼을 때가 제일 맛있다. 잠시 짐을 내려놓으려 찾은 곳이었지만, 혜원은 그곳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잊고 있었던, 혹은 잃어버렸던 자신의 조각들을 찾아간다. 그렇게 추운 겨울바람이 가고, 따뜻한 봄볕이 오고, 무더운 여름을 지나, 붉은 가을이, 또다시 겨울이 온다.


ⓒ리틀포레스트 스틸컷


혜원은 엄마의 레시피 대신 다른 방식으로 음식을 만든다. 손으로 꾹꾹 눌러 담은 편지에 새로운 레시피를 적고는, 다시 제 길을 향해 훌훌 떠난다. 어느 한때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아갈 곳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잠시 가만히 쉬어 바람을 느끼고 있노라면, 어느새 눈 녹고 보드라운 흙길이 드러날 것이다. 걷기에 가장 적당하고, 쉬기에 가장 적당하고, 열심을 다하기에 가장 적당인 그런 때가 말이다. 가장 적당한 때, 혜원은 그녀만의 작은 숲을 향하여 걸음을 옮긴다.


도망친 청춘과 돌아온 청춘과 쭉 그 자리를 지킨 청춘, 그들은 모두 여전히 봄이다. 곶감 여물고 배추 단단해지고 강아지 오구 훌쩍 자라났는데, 그들만 여전히 추운 겨울일 리가 없다. 꼭꼭 씹어 넘겼던 그들의 밥술에는 분명 용기와 사랑의 씨앗이 담뿍 담겨 있었을 테니까. 설령 비바람에 휩쓸릴지라도, 숲속의 씨앗은 분명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을 테니까. 청춘들의 작고 단단한 숲, 푸르른 봄볕이 가득 내린다.  




ⓒ리틀포레스트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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