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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May 07. 2018

어른이 된 나는 어지러워

::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이 글은 브런치무비패스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대체재
= 한 상품의 가격이 치솟을 때,
소비자들은 해당 상품의 소비를
줄이는 대신
다른 상품을 찾게 되는 것



학창 시절, 사회 시간에 어렴풋이 대체재라는 경제 용어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대체재란, 커피값이 오르면 커피 대신 홍차를 먹고, 쌀이 비싸지면 라면을먹고, 볼펜이 비싸지면 연필을 쓰는 것. 하지만 요즘은 아무리 고민해봐도 '대체'라는 게 참 말처럼 쉬운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는 커피고, 홍차는 홍차다. 커피를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커피를 좋아하던 내가, 이제는 커피에 덜 열광하게 된다면 또 몰라도.



ⓒ라이크 크레이지 스틸컷


영국 여자 애나는 교환 학기를 위해 LA를 가고, 그곳에서 미국 남자 제이콥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애나의 편지 한 통으로 시작된 그들의 사랑은 거침없고, 귀엽고, 푸르다. 영화 스크린을 반으로 똑 접을 수 있다면, 제이크와 애나의 모습이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어진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사랑도 있기 때문이다. 제이크와 애나의 모습이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애나의 인생에 성큼성큼 들어와 반쪽을 차지한 제이크, 애나의 이야기를 듣고, 애나의 눈을 바라보고, 애나에게 슬쩍 말을 거는 제이크. 둘의 시간은 서로를 바라보는 상태로 빠르게 확장해 나간다.



ⓒ라이크 크레이지 스틸컷

달콤한 시간을 쌓던 도중, 애나의 학생 비자는 만료되고 애나는 영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상황에 놓인다. 하지만 제이콥과 한 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애나는 어리광을 피운다. "나 영국에 돌아가지 않을래." 애나와 제이콥은 그렇게 비자의 만료를 무시한 채 나른한 여름날을 보낸다. 사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에 잠시 들렸다가 미국으로 돌아온 애나. 하지만 비자 만료를 무시했던 애나에게는 입국 금지령이 떨어진다.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고, 함께하고 싶은데 함께할 수가 없는 그들의 장거리 연애는 그렇게 시작된다. 휘청이고, 무너지고, 흔들리고, 그러다가도 다시 늦은 새벽, 전화를 걸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애가.



ⓒ라이크 크레이지 스틸컷

그동안 장거리 영화라는 소재는 참 그랬다. 눈에서 안 보이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빈자리에 새로운 사랑을 심는 일을 아픈 성숙의 과정처럼 표현하곤했다. 혹은 그 반대로, 우두커니 상대를 추억하고 그리는 모습을 '순정'이나 '지고지순'의 모습으로 포장했다. 재회하면 해피엔딩,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새드엔딩.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장거리 연애에 대한 영화라기에는, 좀 달랐다. 전개는 예상했던 대로 뜨뜻미지근한 장거리 연애의 클리셰였지만, 영화는 사실 어린 시절의 달콤함과 어른의 알싸함 사이의 어지러움에 명확한 방점을 찍는다. 다시 말해, 영화는 장거리라는 물리적 공간 특성을 다루는 동시에 시간이라는 거리에도 중요한 포인트를 둔다.



ⓒ라이크 크레이지 스틸컷


영국 여자 애나의 피사체를 집중적으로 두고 본다면, 시간의 흐름은 더욱 명확해진다. 작게는 애나의 옷차림에서부터 시간의 흐름이 가장 크게 드러난다.애나는 학생답게 격식 없는 옷을 즐겨 입는다. 특히 신기 편한 단화를 신고, 청바지를 입고, 요란한 팔찌를 매치한다. 제이콥과 함께 있는 애나의 모습은 갓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온 대학생처럼, 적당히 성숙한 소녀의 모습과 어리숙한 천진난만함으로 청량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그녀가 영국에 돌아간 뒤 제이콥과 헤어졌을 때, 그녀의 모습은 미묘하게, 그리고 급작스럽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불편한 치마를 추스르며 높은 구두로부터 내려온다. 물론 직장인이라는 새로운 타이틀도 그녀의 변화에 크게 기여한다. 그녀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앤 해서웨이처럼, 세련된 포즈와 말끔한 옷을 입고 서글서글한 어른의 미소를 짓는다. 제이콥과 헤어진 뒤, 애나는 더 이상 술을 즐겨 마시지 않는다. 건강한생활을 위해 아침을 챙겨 먹고, 좋아했던 위스키를 마시지 않고, 규칙적인 생활을 시작한다.

애나가 제이콥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애나의 삶은 더욱 어른스러운 것이 된다. 그녀가 삶의 규칙에 익숙해지는 모습은 사실 놀라운 변화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싫어 나라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법까지 가뿐하게 무시하던 어린 소녀가, 이제는 일찍 일어나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술을 줄이는 어른이 됐다.법조차 두렵지 않았던 애나가, 이제는 꼬박꼬박 알아서 규칙과 도덕을 만들고 지키는 어른이 되고 만 것이다.



ⓒ라이크 크레이지 스틸컷


제이콥과 애나를 포함해서, 사실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됐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훌쩍 어른이 되어버리곤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시절의 시간들은 대체 불가능이라는 거다. 현재의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애나와 제이콥이 서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인 것처럼 우리의 과거와 추억은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특별한 무언가다. 우리는 늘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고, 때때로 안 좋은 기억까지 미화시켜 과거를 최상의 달콤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재주까지 있다. 그래서 애나는 늘 어지럽다. 승진을 하고, 잘생긴 새로운 남자 친구가 생기고, 그에게 또 멋진 프로포즈를 받는대도,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어린 시절의 달콤함이 그녀를 방해한다.

 


ⓒ라이크 크레이지 스틸컷


시간이 흘러 애나의 비자 문제는 해결이 되고, 마침내 제이콥과 애나는 재회한다. 어른이 되어 돌아온 애나는 특별한 감정으로 어린 시절의 LA를 둘러 본다. 이제 애나는 제이콥과 함께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곳에, 마냥 순수하고 청량했던 어린 소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머릿속에 번뜩번뜩 떠오르는 옛 추억만이 그들을 지탱해줄 뿐. 함께 서로를 꼭 껴안은 두 어른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고 추억하며 묘한 현기증을 느낀다. 열린 결말로 끝난 그들의 뜨뜻미지근한 연애의 끝이, 관객에게 그리 궁금증을 자극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마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어린 시절은 감히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다는 걸. 그리고 동시에, 어른이 되어버린 이상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그때 그 시절들은 온 삶을 지탱했던 소중한 기억인 동시에, 마냥 집착할 수만도 없는 그런 시간들이라는 걸. <Like crazy>와 <Patient> 라는 삶의 지침 사이에서, 어른이 된 이들의 시간은, 몽롱한 꿈과 또렷한 아침 사이에 놓인 어지러운 새벽 4시다.



ⓒ라이크 크레이지 스틸컷


덧. 수년 후 이 영화를 다시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과학 기술의 발달로, 지금보다는 덜 힘겨운 장거리 연애의 정의가 새롭게 시작될까? 그래도 여전히 그곳의 시간과 이곳의 시간은 다를 테니. 여전히 쓸쓸하고 얼얼한 사랑의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이 영화를 찾고 또 찾을 테다. 덕분에 이제는 스크린에서 만날 수 없는 안톤 옐친에 집중했고, 풋풋한 제니퍼 로렌스의 모습도 반가웠다. 뻔한 표현이지만, 정말이지 궁금했다. 그리운 건, 그때일까. 그대일까 하고. 첫사랑의 싱그러움이 겪어야  할 아찔한 어지러움. 라이크 크레이지의 재개봉은, 흡족하리만큼 이 계절과 무척 잘 어울렸다. 봄, 바람, 라이크 크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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