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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May 07. 2018

초록 지붕의 앤 말고,

:: 넷플릭스 드라마 빨간 머리 앤 Anne with an E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


초등학생 때, 사서 도우미를 했었다. 친구들이 반납한 책을 올바른 서가 위치에 꽂고, 친구들이 찾는 책을 빠르게 찾아 건네주고, 새로 들어온 책에 바코드를 붙이는 잡일을 했다. 근무 시간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한 두 권씩 책을 빌려 가방에 넣어 왔는데, 그때 좋아했던 책들이 <말괄량이 삐삐>, <오즈의 마법사>, <해리포터> 등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단연 좋아했던 책은 <빨간 머리 앤>. 빨강, 파랑, 초록의 두꺼운 표지 속에 들어 있던 앤의 말들이 참 좋았다. 지칠 틈도 없이 조잘대는 앤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하루가 금방 저물었다. 앤이 가르쳐 준 상상력과 행복의 밭에서,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그 누구도 내게 "너는 빨간 머리 앤을 왜 좋아해?"라고 물어본 적은 없다. 다만 "너 빨간 머리 앤 좋아하지?"라며 나를 잘 알지 못하던 사람도 내게 말을 걸어오기는 했었다. <빨간 머리 앤 Anne with an E>를 보게 된 계기도 그랬다. "빈짱 넷플 하면 앤 보렴"이라는 말에는 별다른 추천 사유도, 적극적인 영업도 없었다. 그는 건성으로 추천했고, 나 역시 건성으로 끄덕였다. 별다른 기대감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누른 이후, 나는 꼬박 하루 만에 <빨간 머리 앤> 시즌 1을 모조리 시청했다. 뭐랄까, 좀 색다른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몰랐던 앤이 보였기 때문일까. 앤과의 재회가 유난스럽고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빨간 머리 앤에 열광하고 환호했던 이유가 조금은 다른 지점에서도 보이기 시작했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그녀가.

이때까지 앤은 밝고 해맑으며 통통 튀는 캐릭터로 주목 받았다. 모퉁이를 돌면 멋진 일이 펼쳐질 거라며 환한 웃음을 짓는 그녀의 미소에서, 사람들은 희망과 위안의 힘을 느꼈다. 늘 맑고 푸르른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앤의 모습은 꼭 희망의 교과서 같다. "힘든 일이 있어도 밝은 미소를 잃어선 안 돼", "내일 일을 알 수는 없지만, 걱정으로 풀에 죽어 있지는 마." 등의 앤의 말들은 뻔한 자기 계발서나 위로의 문구가 되어 가볍게 흩날리곤 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의 앤의 모습일 뿐, 사실 앤의 이야기에는 더 깊은 아픔이 있다. 그녀가 상상을 하기 시작한 이유는, 어린 그녀 앞에 놓인 불운의 상황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녀가 행복을 꿈꾸게 된 계기는, 꿈만이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Anne with an E


넷플릭스의 빨간 머리 앤은 그런 앤의 굴곡진 비극의 삶에 좀 더 큰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비극을 이겨낸 하나의 자아로서 앤에 주목한다. 이전까지의 앤의 원제가 <Anne of green gables> 그러니까 초록 지붕 집의 앤이었다면, 넷플릭스 드라마의 원제는 <Anne with an E>다. 전자의 앤이 어딘가에 소속되고 귀속된 상태라면, 후자의 앤은 보다 자유롭고 주체적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에 환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똑똑한 여자 사람 앤"이라는 설정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간의 책에서도 앤은 늘 똑똑하고 영민한 아이로 그려졌다. 다만 넷플릭스의 앤은, 남자아이들만의 쓸모있음이 '여자아이'의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그린다. 이제껏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만을 예비하는 남성의 도구로 전락해 있었다면, 이제 이들은 '어디 여자가'라는 말에 조금씩 반기를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에이번리에는 딸들이 보다 더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고민하는 '진보적인 어머니' 모임이 있고, 결혼하지 않아도 충분히 멋지게 살아갈 수 있는 조세핀 할머니가 있다. 당연, 우리의 똑 부러진 빨간 머리 앤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은
제가 거창한 낱말을 쓴다고 비웃어요.

하지만 아저씨,
생각 자체가 거창하다면
그 생각을 표현하는 데
거창한 낱말을 쓰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빨간 머리 앤을 고전으로 분류하느냐에 대한 입장은 각기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책도 어느덧 세상에 나온 지 110년이 되었으니 이쯤 되면 <빨간 머리 앤> 역시 고전에 포함될만한 책이라고 나는 기꺼이 믿는다. 대개의 고전 소설이 훌륭한 남성의 영웅적 연대기에 주목했다면, 적어도 빨간 머리 앤은 여성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이전까지 여성이 주인공이 된 문학의 패턴처럼 이야기의 중심 소재를 사랑의 감정으로 국한하지도 않는다. 앤은 길버트로 인해 사랑의 어지러움을 느끼기는 하지만, 사실 그 이야기는 그녀의 삶에 큰 주제가 되지는 않는다. 앤은 그저 자아 그 자체로서 움직이며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떠들고, 노래한다. 그런 앤의 말들은 그 어떤 문장보다 영롱하며 아름답고 통쾌하다. 여자도 거창한 말과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걸, 이 작은 소녀는 똑똑하고 멋진 낱말들로 날카로운 일침을 날린다.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런 앤의 조잘거림이 매력적으로 잘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공감할 수 있는 유대로 엮인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11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들은 많다. 월경을 겪는 여자아이들은 여전히 그것을 부끄러움이라 생각하고, 남자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조롱을 던진다. 소위 말하는 '여자가 할 일'과 '감히 여자가 하는 일'의 경계는 지워질 줄을 모른 채 또렷하기만 하다. 그런 상황에서 빨간 머리 앤의 말이 여전한 울림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도, 앤은 여전히 배울 게 많은 친구다. 나는, 아니 우리는, 여전히 외로운 마음을 이해해 줄 당차고 똑똑한 앤의 문장들이 필요하다. 당차면서도 부드럽고, 단단하면서도 예리한 그녀의 말들이. 때문에 시즌 2가 기다려지는 건 넘나 당연한 일! 아기다리 고기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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