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원더
ⓒ영화 원더 스틸컷
학부시절 학기마다 한 번쯤은 꼭 배우는(시험에 등장하는) 스토리텔링 개념이 있는데 바로 <영웅의 12단계>라는 개념이었다. 미국의 어떤 아저씨(조셉 캠벨)는 원질 신화를 낱낱이 분석했고, 공통으로 도출된 소재들을 가지고 신화에는 17가지의 여정이라는 패턴이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보글러와 같은 다른 작가들이 추리고 또 추려 12단계를 만들었다. 물론, 17단계가 12단계로 슬쩍 줄었다고 해서 그 순서를 달달 외우게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시험이 다 그렇듯) 시험지를 작성하기 전에서야 열심히 외워본다. 일-모-소-스-관… (일상에서의 탈출-모험에의 소명-소명의 거부-관문 통과…) 기타 등등.
ⓒ영화 원더 스틸컷
콕 하고 누르면 뚝딱 하고 나오는 개념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인공이 영웅다운 영화를 볼 때면 나도 모르게 은근한 분석을 시작하게 된다. 새롭게 등장한 저 인물은 영웅의 여정을 돕는 관문 수호자구나, 이때쯤 되면 시련이 닥치겠구나. 아 저게 보상 단계구나. 잘 나가는 듯싶다가 또 한 번 시련을 겪겠지? 하고. 어디 보자, 영화가 다 끝날 때가 됐구나. 심장이 약해서 깜짝깜짝 놀랄 만한 영화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이런 복선을 느끼는 일이 은근히 재미있고 보람차다. (사실 그나마 배운 걸 써먹는 느낌이 들어서 일지도 모르겠지만)
ⓒ영화 원더 스틸컷
영화를 자르고, 쪼개어 보면 그간 배웠던 스토리 구성의 기본 개념들이 속속들이 다 맞을 것 같은 영화를 보았으니, 그게 바로 <원더>였다. 홈스쿨링을 하던 어기(1. 일상의 세계)는 학교에 다니기로 약속(2. 모험에의 소명)하고, 첫날 등교 이후 학교 다니기를 거부(3. 소명의 거부)하지만 친절한 친구 잭 윌(4. 조력자와의 만남)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윌에게 과학 시험 문제를 알려준 것을 계기로 이들의 사이는 더욱 돈독해진다.(5. 관문 통과) 12가지까지 나열하자니 벌써 지루하니 이쯤에서 생략!
ⓒ영화 원더 스틸컷
<원더>는 이렇게 영웅의 12단계에 찰떡같이 들어맞는 어기의 이야기지만, 사실 <원더>는 영웅을 알리는 얘기만은 아니다. 이 영화는 오히려 영웅의 세계를 이루는 다양한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춘다. 오랜 날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지 못해 외로웠을 텐데도, 어리광 한 번 부리지 않고 꿋꿋한 미소를 내보이는 올리비아, 모든 것이 완벽한 친구의 가족을 보며 느끼는 질투심에도 불구하고, 먼저 다가가는 걸음으로 부서진 관계를 회복하는 미란다, 저 자신이 왕따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어기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잭 윌과 썸머, 고집불통에 이기적인 부모 사이에서도 정정당당한 박수를 보낼 줄 아는 줄리안, 친구를 위해 용기 있게 싸우는 어기의 친구들과 언제나 정의를 편에서 힘이 되어주는 조력자 투쉬만 교장 선생님까지.
ⓒ영화 원더 스틸컷
이 모든 조화로운 하모니는 다름을 이해하고 소외를 포옹하는 힘으로 이어진다. 영화를 볼 때는 너무 비현실적으로 완벽한 거 아닌가 싶은 은근한 괴리감이 들기도 했다. 물론 어기는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어기의 세계는 하이에나가 득실득실한 사파리나, 악어 떼만이 가득한 위험한 정글은 아니다. 그애게는 저택에 살 만한 경제적 부가 있고, 계속된 희생에도 생색 한 번을 내지 않는 착한 가족들이 있고, 든든하고 쿨한 썸머(는 이름까지 쏘쿨)나 잭과 같은 친구들도 있으니까.
ⓒ영화 원더 스틸컷
외모는 바꿀 수 없어요.
그러니 우리의 시선을 바꿔야죠.
하지만 문득, 사실 그건 현실/비현실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치념했다. 다만, 아직 우리의 삶이 그런 용기(잭 윌-투쉬만 교장 센세-비아와 미란다의 것)에 덜 익숙한 건지도, 덜 준비된 걸지도 모르겠다는 반성이랄까. <원더>는 마냥 비현실적인 이야기, 이상적인 영화인 것만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당연히 만들어야 할 삶의 과제일는지도.
이 작고 귀여운 영웅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남기 위해, 어기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가 되고, 이곳의 세계가 되기 위해, 이 영화의 완벽한 하모니가 오래오래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어기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의 삶도 영원히 영롱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그럴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는다. 승리의 경험은 언제나 영웅을 더욱 단단하고 용기 있는 인물로 만드는 법이니까. 이 멋진 하모니들은 점점 더 원더풀한 세상,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