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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May 31. 2018

불안을 잠시 이겨내는 가장 좋은 방법

역시 잠이 최고야 ♡(⑅˘͈ ᵕ ˘͈ )♡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이를 악물고 자는 거야?

어려서부터 혼자 방을 썼다. 그러니 잠버릇을 알 도리도 없었다. 친구와 함께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던 어느 날, 친구는 아침부터 깜짝 놀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밤새도록 내가 이를 갈았다고 했다. 바드득바드득 가는 짐승 소리에 놀라 잠에 통 들지 못했다고, 친구는 투덜거렸다.


이를 갈아대는 습관은 고쳤는지 도통 모르겠지만, 대신 언제부턴가 아침에 눈을 뜨면 어금니를 악물고 있는 내 모습에 놀라서 깰 때가 많았다. 며칠을, 아니 몇 해를 그런 잠버릇에 시달렸는지는 모르겠다. 불편한 꿈을 자주 꿨고, 이따금 턱이 아팠고, 이가 잦게 시렸다.  


그때도 그랬다. 2014년 봄, 아침부터 저녁까지 꽉 찬 스케줄로 하루를 보내곤 했다. 1교시부터 마지막 교시까지 학교 수업을 다 듣고 나면, 문화원으로 자리를 옮겨 늦은 저녁까지 독일어 수업을 들었다. 가방에는 늘 두꺼운 교재들과 책들이 빼곡하게 뒤섞여 있었고, 매일매일 그 무거운 가방을 멘 채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운 좋게 자리를 발견하면 이내 곧 눈을 붙이고 쏟아지는 잠에 빠졌다.   


삶은 늘 바빴고, 머리는 언제나 아팠고, 성과는 없었다. 웃는 일보다 무기력한 일들이 더 많았다. 학원이 있던 서울역 거리에는 노숙자들이 득실득실했다. 그들은 내게 이따금씩 은근한 으름장을 던졌고 잔뜩 긴장한 나는 늘 쫓기듯 집을 향해 도망쳤다. 전사하는 영웅처럼 쓰러지듯 돌아와 시계를 보면, 이미 하루는 꼬박 지나 있었다. 나는 지쳐 있었다. 가위에 자주 눌렸고, 악몽을 자주 꿨다. 무시무시한 새벽을 보내고 나면 어느덧 태연한 아침이 왔다. 그리고 다시 반복, 또 반복.  




물론 내가 욕심나서 시작한 공부였지만, 의지는 욕심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누굴 원망할 수도 없고, 누구에게 투덜댈 수도 없었다. 그때 일기장을 살펴보니 밥 먹을 시간이 없어 요거트나 삼각 김밥을 먹었다는 말만이 가득했다. 하루의 일과가 아니라, 우유나 미숫가루, 라면 따위의, 정성이라곤 눈꼽 만큼도 없는 음식만이 가득한 식단 일기. 그때 그 안에 적혀 있던 것은 그냥 음식의 나열이 아니라 주인 없는 투정이나 대상 없는 화풀이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를 악물고 자는 습관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건 최근이었다. 오랜만에 눈을 뜨니, 턱관절이 한창 긴장한 채 뻣뻣하게 신경을 곤두서 있었다. 친숙한 느낌이었고, 또 오랜만인 기분이었다. 모순적이게도 간만의 재발을 통해 그간의 안녕을 인식한 거였다. 걱정이 됐다.   

요즘, 다시 불안을 느끼는 걸까? 나, 또 탈진해버린 걸까?  



갑자기 등장한 세라문


미안해 솔직하지 못한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꿈이라면

최근 <달의 요정 세일러문>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곧잘 턱시도 가면과 결혼하는 꿈을 꾸곤 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다시 본 세일러문은 참 신선했고, 유쾌했고, 그리고, 참 멋졌다.


주인공 츠기노 우사기는 지각을 안 한 적이 없을 정도로 늦잠 꾸러기이자 덜렁이, 게다가 울보다. 엄마도, 친구인 나루짱도, 동생 신고도 모두 우사기를 멍청이라고 놀려 대지만, 사실 우사기는 그런 놀림에 별 큰 신경 쓰지 않는다. 복도에 서 있으라는 벌을 받으면서도 도시락을 까먹을 수 있다며 좋아하는 (좋게 말해) 천진함, 지각하는 와중에도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고양이를 구해주는 (오지랖이 아닌) 따뜻함.


우사기 캐릭터가 유독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이유는, 그녀의 귀여운 탐욕이나 따뜻한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그녀를 좋아한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가 잠을 잘 잔다는 데 있었다. 숙제할 마음이 들지 않을 때면, 걱정이 닥쳐올 때면, 멋지게 적을 물리치고 난 다음 날이면, 언제나 그녀는 명랑하고 해맑은 목소리로 외친다. ‘역시 자는 게 최고야!’라고.


문득, 우사기의 맑고 티 없는 명랑함은 아마도 그런 편안한 숙면에서부터 오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푹 쉬고 잘 자는 것. 좋은 꿈을 꾸고, 내일의 아침을 기다리고, 깊고 편안한 쉼을 갖는 것. 그것만큼 삶에서 중요한, 동시에 삶을 지탱하는 힘이 또 있을까.


자기 전까지 끙끙대기

자면서도 걱정하기

지나간 오늘을 후회하고

다가올 내일에 미리 겁먹기


이런 삶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우사기가 내심 부러웠고 또 본받고 싶었다. 사실 정말 그랬다. 잘 때까지 끝없는 고민으로 나를 옭아매거나 괴롭힐 필요는 없는데, 달콤하고 꿈을 꾸지 말아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는데.


‘오야스미!(잘자)’라고 외치는 당찬 우사기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도 덩달아 조금은 가볍고 맑아진 기분이 들었다. 오늘만큼은, 그래,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걱정 없이 잘 자고 잘 쉬어야지.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좀 더 가볍고 개운한 하루가 될지도 몰라.

이를 악무는 대신, 여유로운 미소를 건네는 하루가 될지도 몰라.   

침대에 누워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오야스미, 오야스미나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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