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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Jul 03. 2018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영화 변산











이 글은 브런치무비패스를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영화 변산 포스터

이준익 감독의 박정민 주연의 영화 <변산> 시사회에 초대받았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본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그리고 영화를 보러 가는 길에서야 줄거리를 찾아보고 놀랐다. 이런 아뿔싸. '래퍼' 얘기라는 거다. 걱정 반 우려 반. 줄거리를 채 다 읽지조차 못한 채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세상에. 나 이 영화 어떻게 보지?

ⓒ영화 변산 스틸컷

'랩'을 소재로 했다는 것부터가 덜컥 겁이 났다. '내가 그런 영화를 버틸 수 있을까?'하고 말이다. 한 때 온 동네 '크루'와 '레이블' 간의 랩을 평가하고 줄을 세우던 학창 시절을 보내왔으니, 허세 가득한 라임이나 펀치 라인, 실속 없는 플로우에도 곧잘 손발이 오그라듦을 숨기지 못하곤 했던 나였다. 오돌토돌 한가득 올라올 닭살들이 두려웠다. 그치만.. 여기까지 왔는데 뭘 어떡해…. 밀려올 은근한 두려움을 애써 무시한 채 극장에 들어섰다.



ⓒ영화 변산 스틸컷

거두절미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학수의 랩은 훌륭했다. 나는 오늘도 박정민 배우의 연기력을 인정하고 만다. 피아노도 잘 치더니, 이렇게 랩까지 잘하는 배우가 어디써! 더불어 이준익 감독의 녹슬지 않은 감각에도 손뼉을 쳤다. 이렇게 힙한 영화를 만드는 59년생 감독님이 또 어디계셔!!!!


ⓒ영화 변산 스틸컷

서바이벌 대회의 심사위원들은 학수에게 사투리가 남아 있다고 지적하지만, 그는 고향이 '서울'이라고 둘러 대답한다. 시큰둥한 목소리에는 '더는 묻지 말라'는 은근한 엄포가 놓였다. 고향도 지우고, 기억도 지웠다. 그의 삶은 '질릴 대로 질려 버린 표정'으로 가득하다. 편의점 알바를 하며 넌덜머리 나는 중학생 팬들을 상대하고, 방음조차 잘되지 않는 좁은 단칸방에서는 시끄럽다는 나무람이 쿵쿵 벽을 타고 전해진다. 그리고 6년째 '출첵' 중인 쇼미더머니까지. 징글징글한 생활 속, 한 치 앞을 모르는 그는 여전히 그리고 꾸준히 글을 쓰고 노래를 만든다.




아 참 제가 제일 좋아했던 크루는 무브먼트였습니다 (TMI..깔깔) 얀키쨩 반가와서 내적 소리질렀어요.. 저 TBNY 싸인 씨디도 있다구요...



ⓒ영화 변산 스틸컷

그랬던 그가 고향에 돌아간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전화 한 통. 그는 그렇게나 부정했던 고향 변산으로 걸음을 향한다. 도착한 병원에서 아버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쩡한 얼굴로 아들을 반긴다. 그때 그는 박차고 돌아갔어야 했다. 곧장 서울로 튀었어야 했다. 그때 그랬었더라면, 그는 징글징글했던 흑역사들을 다시 마주하지 않았어도 됐을 테니까. 매일 매 순간 '나 돌아갈래!'라고 내적 울부짖음을 외치지 않았어도 됐을 테니까. 하지만 고향을 뜨지 못한 그는 결국 잊고 있던 혹은 잊고 싶었던 추억들을 계속해서 맞이한다. 그 과정에는 아버지부터 옛 고향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동향인들로 소란스럽다. 변산 그의 고향은, 좁디좁은 동네니까요.

ⓒ영화 변산 스틸컷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의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처럼
그 언제서 부터인가
걸어 걸어 걸어 오는 이 길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가야만 하는지



연어는 알을 낳는 시기가 다가오면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으로 거슬러 올라간 연어처럼, 고향 변산으로 돌아간 학수의 삶은 또 다른 기점을 맞는다. 알을 낳는다는 건, 어른이 된다는 것. 인생의 새로운 굴곡을 맞는다는 것. 변산은 그에게 '흑역사'가 물꼬를 튼 시골 마을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변산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추억의 친구들이 있는 곳, 그보다 그를 더 잘 아는 따뜻한 시선들이 있는 곳, 평생의 상처가 되고 눈물이 될, 동시에 그 눈물을 닦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아무리 갯벌의 흙이 덕지덕지 달라붙어도, 까짓거 개운한 등목 한 방이면 시원하게 씻겨 내려갈, 인생의 새로운 굴곡을 알려주는 지표 같은 그런 곳. 그는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과거를 걸어 걸어 올라간다. 그 거슬러 올라감을 통해 그간의 흐트러진 자신의 과거 기억들을 다시금 새롭게 정렬하고, 용서하고, 극복하고, 해결하고, 이전보다야 훨씬 더 개운한 관계를 맺어 나간다.



ⓒ영화 변산 스틸컷

돌아간 학수의 글들은 여전히 그 어떤 시인의 것보다 아름답게 빛난다. 고향을 닮고 노을을 닮은 그의 글은 꼭 싱싱하고, 붉고 탐스럽다. 그 따뜻함과 생기 어림에 나는 연신 박수를 보낸다. 그 어느 때보다 개운해진 학수의 모습을 보며 어릴 적 들었던 음악들을 가만가만 꺼내 들었다. 여전히 세상은 반기를 들고 싶을 만큼 답답하고 갑갑하지만, 그럼에도 시원할 순간은 곳곳에 있다는 걸 느낀다. 그의 세상은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답다. 조금 찌질하고 멋없어도, 그래서 꽤 스웩 넘치고 힙한 한 편의 시. 그토록 돌아가기 두려웠던 고향이지만, 막상 돌아간 그의 삶은 괜찮고 괜찮고 괜찮다. 가난해서 줄 것이 노을밖에 없는 곳이지만, 그 노을이 생애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이 되어 줄 테니까. 이렇게 계속 '걸어 걸어 걸어가다 보면 뜨겁게 날 위해 부서진 햇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영화 변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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