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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더비니 Jul 26. 2018

가장 맑은 방식의 경고

:: 영화 우리들



영화 모임을 함께한 지도 어언 1년이 지났다. 처음부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예전보다 영화 감상에 투자하는 시간은 훨씬 늘었다. 수 년 전 '1년에 몇 편 보는지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에서 '적어도 한 달에 한 편 이상은 깊숙하게 보고 읽고 쓰는 정도'가 되었으니 과거보다야 영화를 꽤 많이 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나. 안 하던 취미 활동을 하려니 가끔은 꼼짝 없이 2시간을 앉아 가만히 영화 보는 일이 만만치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영화의 맛을 제대로 즐기고 있긴 한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잔뜩 체해버린 건 아닌지.
 
아직도 '영잘알'이 되려면 멀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기준과 취향은 조금씩 생겼다. 나의 개취를 고백해보자면 (취!존!부!탁!) 다 떠먹여 주는 쪽보다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쪽이 더 좋고, 도덕책처럼 교훈을 주는 쪽보다는 나만의 정의를 내리고 고민하는 쪽이, 대사가 주는 정직한 감동보다는 대사 사이에 숨어 있는 여백과 행간의 감동이, 배우의 정직한 연기를 구경하는 것보다는 잘 짜인 개성 있는 연출을 구경하는 편이 훨씬 더 좋다. 한갓 놀고 먹는 것에서도 쓸데 없이 의미를 찾으려는 변태적 성격 때문이려나.


ⓒ영화 우리들 포스터


개취를 고려해 봤을 때, 영화 <우리들>은 명.확.히. 정.확.히. 완.벽.히. 내 취향을 빗나가는 영화다. 잘 짜인 배경과 인물 설정은 친절하다 못해 극진할 만큼 칠칠하게 준비되어 있고, 대놓고 가장 순수한 아이의 말을 빌려 도덕책 같은 교훈을 넌지시 던지기도 한다. <우리들> 비하인드 스토리에 따르면 이렇다 할 대사도 거의 없었다고 하니, 이보다 더 대사가 정직할 수는 없을 테고, 영화 시간 대부분을 아이들의 말과 표정이 스토리를 이끌다 보니 이보다 더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영화는 없다. 이 모든 개취를 완벽히 빗나갔음에도, <우리들>은 흡족할 만큼 맘에 드는 괜찮은 영화였다.


 

ⓒ영화 우리들 스틸컷


영화 <우리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이들'이다. 늘 외톨이로 지내던 선은 방학을 앞두고 전학 온 지아와 우연히 마주친다. 선은 지아에게 이름을 묻는다. "너 이름이 뭐야?" 이름 하나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들은 쉽게 친구가 된다. 함께 봉숭아 물을 들이고, 실을 하나하나 꼬아 만든 팔찌를 선물하고, 함께 긴긴밤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방학이 끝남과 함께 그들의 우정의 계절도 빠르게 바뀐다. 뜨거웠던 여름이 가고 쌀쌀한 가을이 왔다. 선과 지아의 사이에는 계절의 온도차가 아슬아슬 불안하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티 없이 맑다고 믿었던 아이들의 세계 속,
은근한 폭력과 시기와 질투가 바쁘게 요동친다.
어른들의 세계와 다를 것 없는 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친숙하다.
이 익숙한 기시감은 무얼까.
먹먹한 현기증이 밀려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윤이는 모든 씬 다 기여오...


<우리들>은 '경고'의 영화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혹은 나이기도 했던 어느 시점의 과거가 보내는

가장 맑고 말랑한 방식의 경고랄까.
 
즐거움과 행복으로 이어지는 놀이 대신,
권력과 시기와 질투와 폭력이 줄줄 이어지는.
행복을 찾는 여정을 '미움받을 용기'라 칭하며

미움의 폭력을 당연한 전제로 여기는.


그리고 그런 숨 막히는 경쟁과 폭력적인 시선이
익숙하고 당연한 지금 여기의 모든 세계를 향해

'그럼 언제 노느냐?'는
천진한 의문형으로 던지는
은근한 경고.



다 떠먹여 줘서, 그래서 쉽게 지루해질지도 모르는 이야기지만 <우리들> 속 맑은 개운함과 함께라면 열 그릇이라도 냠냠 맛있게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다. 가만가만 시선을 두고 있노라면 정겹게 다가오는 익숙한 풍경들에 신이 나고, 때때로 울고 웃던 소중했던 과거의 추억들이 떠올라 먹먹한 기분도 든다. "나 (볶음밥 만들 줄) 알아. 먼저! 햄을 안 넣코, 먼저 김치부터 넣코, 그 담 햄! 그 담에 밥! 그 담에 김치! 그다음에 볶으고! 그다음에 섞어! 간단해~!" 따위의 시답잖은, 하지만 무공해 같은 청청한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오랜만에 배시시 격 없는 웃음도 새어 나온다. ‘정말로 이들의 경고는 세상에서 가장 귀엽고 맑고 투명한 방식임이 틀림없어.’ 그 탁월함에 자꾸만 흐뭇한 고개가 끄덕여 진다.

그래서 말인데! 윤이 말 좀 집중해서 새겨 들으새오! 아 경고 두 장이면 퇴장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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