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이처럼 사소한 것들

by 천진의 하루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 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사람들은 침울했지만 그럭저럭 날씨를 견뎠다. p11

저자는 역자에게 이 첫 문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그 속뜻이 충분히 느껴지도록 번역을 부탁했다고 한다.

'헐벗다', '벗기다', '가라앉다', '북슬북슬하다', '끈', '흑맥주', '불다' 등의 단어를 써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암시하고자 했고 그런 뉘앙스가 번역문에도 유지됐으면 한다고 했다고 역자는 썼다.

그 의미를 알고 글을 읽으면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에 긴 바람은 나무에 붙어 있던 나머지 잎사귀마저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냈다. 마을의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내리는 비에 내려앉아 마을을 뒤덮고 긴 바람에 흘러 부둣가에 흩어졌다. 검은 배로 강은 내리는 비에 불었다.

도대체 이 안에서 임신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은 여자를 떠올릴 수 없는 자신이 의아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p29

이 글에 밑줄을 그었다.

펄롱의 고민은 내 고민이다. 매번 다가오는 단계를 의지 없이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불안과 걱정으로 맞이하는 하루에 멈춰 서 돌아봐야 한다는 말을 듣지만 정작 멈춰 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

멈추면 뒤처지고 수렁에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 등을 떠민다.

펄롱의 고민은 내 불안이 제거되지 않는 한 지속할 것 같다.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각자에게 나날과 기회가 주어지고 지나가면 돌이킬 수가 없는 거라고.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 게,

비록 기분이 심란해지기는 해도 다행히 아닌가 싶었다.

날마다 되풀이되는 일과를 머릿속으로 돌려보고 실제로 닥칠지 아닐지 모르는 문제를 고민하느니 보다는 p36

"시간은 아무리 흘러도 느려지질 않으니" p41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p44

나는 오십이 넘었는데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은퇴를 앞두고 막막하기만 하다.

이제는 갈 길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더 깊은 물음에 흔들리고 불안의 가중한다.

점점 다가오는 데드라인 앞에서 새로운 출발을 맞이하기 위한 돌파구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계속해 일상을 돌아보고 고민하고 내 안의 휴화산을 찾고 있지만 복잡한 미로 속에 숨겨둔 희망의 불씨를 찾을 길이 막막함을 느낀다.

잠시 멈추고 찾아야 하는 것인가?

그럼 얼마의 시간을 멈춰야 하는 것일까?

매번 멈추어 찾아야 한다고 멈추고는 잊어버리고 안주해버렸던 시간들에 불안감이 커진다.

시간이 느려져 주면 좋으련만 느려지질 않는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p102

펄롱은 미시즈 월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p120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p121

주말에 동물농장이라는 티브이 프로를 자주 본다.

어린이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새끼를 낳았고 그중 하나가 조금 떨어진 공장에 입양되었다고 한다.

공장 주인은 어느 날 강아지에게 주지도 않은 간식들이 바닥에 있어서 CCTV를 돌려보았다고 한다.

CCTV에는 놀랍게도 어미 강아지가 간식을 물고와 공장의 강아지에게 가져다주고 있었다고 한다.

아내와 나는 그 프로를 보면서 인간보다 낫다고 말했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억제하고 간식을 물어다 주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자식들이 굶는지 죽어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아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는 뉴스를 떠올렸던 것이다.

공장 강아지가 잘못을 저지르려 하자 강력하게 막아서고 야단을 치는 모습도 나왔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자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펄롱은 부모의 교육과 미시즈 월슨의 사소한 가르침으로 바르게 자랐고 자신도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우리가 잊고 살고 있으며 내일이 아니니 눈 감고 사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 사소한 관심이 어쩌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어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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