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흐르는 강물처럼

by 천진의 하루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소설을 읽는 것이 오랜만인 것 같다.

처음 책을 읽을 때 500여 페이지의 두께에 겁을 먹고 하루에 50페이지씩 읽어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빅토리아의 첫사랑과 그로 인한 결실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지나며 궁금증을 더해갔다.

그렇게 손에서 놓지를 못하고 삼일 만에 책을 읽어 냈다.

빅토리아는 연인 윌슨 문의 말처럼 흐르는 물처럼 그때의 선택에 충실하며 삶을 살아냈다.

우리의 삶의 이정표 같은 지시방향들을 켜주는 것 같은 소설이었다.

우리는 과거의 선택을 곱씹고 후회하기도 하며 삶을 전진하는데 더딘 삶을 살기도 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정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빅토리아는 아이를 낳기 위한 삶을 선택하면서 깊은 숲 속 산막에서 자연의 순리를 깨닫는다.

저자는 책의 내용을 통해 무수한 선택 속의 삶을 흐르는 강물처럼 잊고 그때가 옳았다고 생각하라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을 살라는 의미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랑은 오로지 두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 커지는 감정이며, 두 사람 사이에서 애도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라는 걸.

부모님의 사랑은 감취진 보물처럼, 은밀한 시처럼,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오로지 두 사람의 것이었다. p24


그는 내게 본질을 제외한 모든 것을 비운 삶이야말로 참된 삶이라는 사실을, 그런 수준에 도달하면 삶을 지속하겠다는 마음 외에 그다지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p32


이런 사소한 일, 마치 나를 부르는 듯한 석탄 수송 열차의 기적 소리, 사거리에서 마주쳐 길을 무는 이방인, 흙길에 떨어진 갈색 술병처럼 별일 아닌 사건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다.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어도 우리 존재는 탐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를 조심스럽게 수확하듯 신중하게 형성되는 게 아니다. 끝없이 발버둥 치다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거둘 뿐이다.


나는 차오르는 두려움과 슬픔을 이 불쌍한 말에게 쏟아내고 있었다. 월을 만나기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벨이 아는 거라고는 충성과 복종이 전부였다. 내가 먼저 배운 교훈을 돌멩이에 담아 힘껏 아벨에게 던졌다. 이 세상의 모든 선을 이기는 건 악이라고, 아벨에게 마음속으로 외쳤다. 착한 딸이 되든 착한 말이 되든, 복종하든, 사랑하든 마음대로 하라. 그러나 권선징악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건 동화책에나 나오는 이야기니까. p165


낚싯대도 낚싯줄도 바늘도 없이 물고기를 정말로 잡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지금 당장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좋든 나쁘든, 지금은 그저 눈앞에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걸로도 충분했다. p175


이 황막한 벌판에서 임신 기간을 버티고 월의 아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나는 그저 계속해야만 했다. 방광을 비워야 했고, 음식을 먹어야 했다. 열두 살의 내가 어머니 없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였던 것처럼 이제는 어머니로서의 삶 속으로 한걸음 내 디더야 했다. 나는 필요의 부름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p183


낮게 깔린 구름이 골짜기를 감싸 안은 어느 날 밤, 배 속의 아기와 함께 이불이라는 둥지 안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누운 채 지금 숲 속에서 나처럼 온기를 찾아 잔뜩 웅크리고 있을 다른 동물들을 생각했다. 숲 속의 다른 어미들도 나처럼 새끼의 발차기를 느낄까? 그 어미들은 새끼들을 어떻게 먹이고 키우고 보호할까? 몸집이 가장 큰 곰부터 아주 작은 곤충까지, 또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까지, 탄생하고 견디고 시드는 만물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숲 속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윌이 줄곰 내게 알려주고 싶어 했던 진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p187


거대하고 신비로운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숲 속의 집에서 잠을 청할 때면 숲의 심장이 뛰는 소리, 주변의 무수한 생명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와 함께 호흡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밤이 두렵지 않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p188


월슨 문과 사랑에 빠진 것은 내 평생 가장 진실된 행동이었다. 그런 선택이 예기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행동의 진실성이 흐려지는 건 아니다. 그럴 땐 그저 있는 그대로 그 여파를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끔찍하든 아름답든 절망적이든 어떤 결과가 닥치든 간에 그저 최선을 다해 마주하면 된다고, 월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p224


내가 산에서 얻은 가르침이 있다면, 그건 땅은 지속된다는 것, 필요한 때가 되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고, 가능할 때 제 모습을 되찾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었다. p279


그동안 나는 지난날의 선택을 끊임없이 돌아보며 의심했다. 그러나 우리 삶은 지금을 지나야 만 그다음이 펼쳐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가 없고 초대장이 없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공간으로 걸어 나가야만 한다. 그건 월이 가르쳐주고, 거니슨강이 가르쳐주고, 내가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마주했던 곳인 빅 블루가 끊임없이 가르쳐준 진리였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내가 나아가야 할 다음 단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그걸 믿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숲에 깃든 태곳적 혜안은 너무 깊고 복잡해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게 꼭 필요했던 지혜를 다시금 떠올릴 만큼은 헤아릴 수 있었다.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내게 닥친 일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마주하며 살아왔다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살아왔다고 말해줄 것이다. 어면 존재가 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라는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월이 가르쳐주었듯이 흐르는 강물처럼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해줄 것이다. 물론 걸림돌을 무릅쓰며 멈추지 않고 흘러왔다는 게 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강물처럼 나 역시 나를 다른 존재들과 이어주는 작은 조각들을 모으면서 살아왔고,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p416


내가 삶이라고 불러온 이 여정도 잠겨버린 이 강물과 비슷하지 않은가. 저수지로 만들어놓았는데도 온갖 걸림돌과 댐을 거슬러 앞으로 나아가고 흐르는 이 강물,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해 그저 그동안 쌓아온 모든 걸 가지고 계속 흘러가는 이 강물이 내 삶과 같았다.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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